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6-12-10 13:1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가 사랑한 ‘위험한 사고!’


“삶에 대한 자신의 이유인 ‘왜?’를 가진 자는 거의 모든 방법인 ‘어떻게’를 견뎌낼 수 있다.”(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12>: KSA 6, 132쪽). ‘왜?’라는 말은 아이가 말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하고 듣기도 하는 말이다. 보고 듣는 정보를 놓고 그것의 ‘원인’을 묻는 말이다. 생각 중에 떠오르는 모든 상상의 산물에 대해 인간은 본능적으로 그 ‘까닭’을 묻는다. 모든 생각의 궁극적 진원지를 알고 싶은 것이다. 지식에 대한 욕구 내지 앎에 대한 의지에는 바로 근원에 대한 파악을 시도하는 본능이 자리 잡고 있다.
어떤 행위에 대해 ‘왜’라는 ‘까닭’을 묻는 것은 그 행위의 ‘동기’ 내지 ‘의미’ 혹은 ‘목표’와 ‘이상’을 따지는 경우가 된다. 현재의 행동 동기를 수동적 처지에 놓여 ‘이 일이 왜 일어났는지’에 대한 물음은 최초에 원인을 제공한 자가 누구인지 묻는 경우다. 혹은 능동적으로 어떤 일에 개입할 때는 ‘그 일을 왜 해야 하는지’와 관련된 ‘의미’ 부여와 동시에 설정한 결과인 ‘목표’를 제시해야 하는 상황이. 최초의 원인 제공자가 인격적인 존재(가령 절대자인 신)일 수도 있고 비인격적인 자연법칙일 수도 있다. 
앞서 니체가 한 말에는 어떤 지식의 궁극적 원천 내지 행위 유발의 진원지를 가진 자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삶을 견딜 수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 그렇다면 왜 ‘왜?’를 가진 자는 어떤 상상도 어떤 상황도 모두 견딜 수 있단 말인가? 왜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무슨 뜻인가? 우선 니체는 왜의 답을 현세(現世)의 외부에서 찾지 않는다. 철저하게 ‘지금’의 판단에 맡긴다. 그리고 판단을 할 때 고정된 선과 악을 설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선을 악의 관점에서, 악을 선의 관점에서 보는 극단적이며 ‘반항적’ 태도를 견지한다. 주어진 정보와 관습화된 행위들에 대해 늘 역류문(逆流文)을 짓고자 한다. 니체는 ‘왜?’의 문제를 이렇게 풀어가는 삶을 위해 이러한 캐치프레이즈를 던진다. “위험하게 살지어다!”(프리드리히 니체, 『즐거운 학문』, 283: KSA 3, 526쪽)
위험한 사상가 니체가 위험스럽게 던진 말 ‘위험하게 살아야만 한다’는 그의 단호한 명법은, 앞서 말한 ‘왜?’라는 것을 가진 자의 중요한 특징이다. 니체 자신의 사유 방식을 따라오라고 하는 것처럼 들리는 이 말은, ‘왜?’라는 방식으로 던지는 물음은 장난삼아 던지는 말놀이가 아니라, 현재를 모두 파괴해야 하는데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묻는 물음이다. 니체가 채택한 사유방식은 스스로 말했듯이 ‘다이너마이트’다. 더 이상 길이 보이질 않을 때 기존의 모든 굴착 도구들을 내려놓고 장애물을 모두 날려버리고 새로운 길을 만들 때 사용하는 마지막 방법이 다이너마이트다. 니체는 이 다이너마이트를 단회가 아니라 손에 항상 들고 던질 준비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폼페이의 베수비오 활화산이 터지듯 우리는 늘 한 손에는 다이너마이트 뭉치를 그리고 한 손에는 폭파 스위치를 들어야만 한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왜?’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하는 자의 진실한 모습이다. 
니체가 제안한 위험한 삶은 현실을 파괴하고 그 파괴에 대한 ‘왜?’에 대한 분명하고도 떳떳함을 가진 삶의 태도다. 니체는 방대하고도 유구한 서구 형이상학과 서양 기독교 전통의 근본을 과감하게 폭파할 것을 권유한다. 아니, 그것을 폭파하지 않으면 절대로 새로운 길을 만들 수 없다고 한다. 방법론의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말은 무슨 방법을 쓰든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도 된다. 현재를 가장 현실로 만드는 인간 스스로의 자기 판단에 대한 정당성을  자신의 내면에서 확보한 자라면, 누구나 방법상에서는 ‘위험한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비록 주어진 실존에 수동적이고 무기력한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하더라도, 니체는 ‘왜?’를 가진 자는 삶의 패배자일 수 없다고 한다. 이렇게 말한다. “지배와 소유자가 될 수 없다면, 약탈자와 정복자가 되라!”(프리드리히 니체, 『우상의 황혼』, <잠언과 화살 12>: KSA 6, 132쪽).     
이러한 니체의 위험한 사고는 현재의 모든 문화적 관습의 전면적 파괴와 동시에 새로운 창조 행위의 계기가 된다. 니체의 위험한 사고 배후에는, (사상이든 종교든) 새로운 정신문화적 가치를 창조하면서 동시에 그 모든 가치에 대해 개방적인 ‘미래 인류’를 원하고 있다. 늘 위험한 인물이 되라고 가르치고 있다. 약탈자와 정복자는 근본적으로 ‘싸워야 하는 본성’을 가진 자의 은유다. 싸워야 하는 본성이 근본인 자에게 ‘왜?’라고 물으면, 그는 선과 악을 초월한 방식의 니체식 답으로 응답할 것이다. ‘네 운명을 사랑하라!’고.               
서양 철학의 근본을 파괴하고자 했던 니체가 사랑한 ‘위험한 사고’는 결국  ‘신의 죽음’이란 말로 요약된다. 니체는 하나님만 제시할 수 있는 궁극적인 ‘왜?’에 대한 대답을 전적으로 인간의 문제로 돌려놓았다. 그리고 니체는 그동안 인간들이 날조한 기존의 모든 가치를 골라가며 파괴하고자 했다.
위험한 사고로 당대 최고의 종교문화에 대한 파괴를 명했던 오래된 진리가 이미 있었던 사실은 우리는 안다. 굳이 니체와 대비하기 위함은 그 목적이 아니다. 니체가 던진 사상의 근본 문제를 성경에서 찾아 선명하게 해명하고, 나아가 서양 기독교가 몰락하는 것의 성경적 대안을 찾고자 하는 의미에서, 우리는 거짓 종교 유대교에 대한 전면적 파괴를 주장했던 그리스도의 성전 파괴 명령을 귀담아듣게 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사십육 년 동안 짓고 있던-필자 주)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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