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공자와 자공이 시를 논하다
子貢曰 詩云如切如磋如琢如磨 其斯之謂與
자공왈 시운여절여차여탁여마 기사지위여
子曰 賜也 始可與言詩已矣 告諸往而知來者
자왈 사야 시가여언시이의 고저왕이지래자
논어 학이편이 이어지고 있다.
“자공이 말했다. ‘시(경)에 이르기를 자르는 듯하고 깎아내는 듯하고 쪼아내는 듯하고 가는 듯하다’라고 했는데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까?”
“공자가 말했다. 사(자공)야! 비로소 (너와)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겠구나. 지난 것을 말해주니 장차 일어날(올) 것을 아는 자로다."
공자와 자공이 언제 어디에서 이러한 대화를 나누었을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이 시는 『시경』(詩經) 「위풍」(衛風)에 출전하고 있으며 위나라의 무왕(조조)을 칭찬하는 시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는 「대학」에서는 군자의 위용과 태도를 예찬하는 것으로도 이해되고 있다.
이 대화 이전에 자공은 공자에게 군자가 가난한 데도 부한 자에게 아첨하지 않거나 부자인데도 교만하지 않으면 괜찮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공자는 그런 정도라도 괜찮은 것이지만 그래도 군자라면 가난함을 즐길 수 있어야 하고 부자라도 예를 늘 찾는 것만은 못하다고 대답하였다. 공자의 이 말을 이어서 자공은 지금 본문에서 그 답을 하고 있는 상황이다.
가난은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고 정신적인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가난은 쉽사리 한 순간에 없어지지는 않는다. 즐거움도 물질적일 수 있고 정신적일 수 있다. 이것도 한 순간에 느껴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군자라면 필연적으로 가난함과 부함을 모두 느낄 줄 알아야 한다. 그는 가난하다고 해서 비굴한 말이나 아첨의 말을 해서는 안 되고 부하다고 해서 교만해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군자는 가난한 중에도 즐거움을 찾을 수 있어야 하고 부한 중에는 반드시 예를 배우는 사람이어야 한다. 이 말은 참으로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속에서 참 즐거움을 찾을 자임을 암시한다. 진정 부유한 사람은 자신의 삶 속에서 늘 예(인류 보편의 도리)를 좋아하는 자이어야 함을 암시한다. 공자가 말하는 즐거움은 군자가 배우고 때로 익히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마음 속에서 솟아나는 그 즐거움일 것이고, 공자 자신이 배우기를 좋아했던 것처럼 예를 좋아하는 배움일 것이다.
자공이 ‘여절여차여탁여마’라고 대답한 것은 공자가 듣고 싶어 하던 대답이었다. 옛날에 시를 논하는 것은 거문고 등의 음악 연주와 함께 정말 흥겹고 풍성하고 마음 편한 모습의 표현이었다. 노자의 81편의 시가 그러한 사정을 증명해 준다. 공자가 자공과 더불어 시를 이야기할 만하다고 한 것은 그만큼 공자가 듣고 싶은 답이었던 것이고 그의 기분에 흡족했던 것이다.
군자는 가난 속에서도 즐거움을 알아야 하고 아무리 부하더라도 사람의 도리를 배우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절’, ‘차’, ‘탁’, ‘마’는 각각 ‘반듯하게 자르고’, ‘가지런히 잘라 내고’, ‘큰 데서 쪼아내고’, ‘쪼아낸 거친 곳을 거칠지 않게 고르게 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신을 이러한 삶과 배움의 자세로 수신하는 것이 군자의 갈 길이다. 공자는 이런 사람과 더불어 시를 논하며 교제하려 한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장차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늘나라에서 살 사람을 가리킨다. 그런 사람이 이 세상에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일단은 가난함과 부함을 모두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 참 의미를 알아야 한다. 그 증거는 먼저는 그리스도와 기꺼이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나타나며 동시에 그리스도의 부활의 영광을 맛보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군자가 자신을 세상의 부패로부터 가지런히 잘라내듯이 그리스도인은 죄악으로부터 세상의 일상의 의미 없는 일들로부터 잘라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자신 안에 있는 죄악들을 쪼아내야 하고 죄악의 거친 일들로부터 자신을 갈고 또 갈아서 마모되어 반지르르하게 만들어 가야 한다. 가난하든 부하든 죽는 그날까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기꺼이 즐겨 참여하고 그 후에 그리스도의 부활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
대한의 그리스도인이여!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외침들을 기억하며 살아가도록 하자.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1:24).
“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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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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