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공자의 스승론과 그리스도인의 거룩
子曰 溫故而知新 可以爲師矣.
자왈 온고이지신 가이위사의.
子曰 君子不器.
자왈 군자불기.
논어 제2장 위정의 계속이다.
“공자가 말하기를 옛것을 찾아 익혀서 새것을 알면 스승이라 여길 만하다.”
“공자가 말하기를 군자는 그릇처럼 한 편으로 편향되지 않아야 한다.”
주자는 溫을 깊이 찾고(尋, 심) 깊이 이해해내는 것(繹, 역)으로 해석하였다. 옛 것은 지난날에 들은 것이다.(舊所聞, 구소문) 새것은 지금 들은 것이다.(今所聞, 금소문) 배우는 사람(學者)은 이렇게 이전에 배운 것을 익히고 또 익혀서 그것의 본성을 바르게 깊이 이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동시에 이전의 것이 오늘날에 지니는 의미를 찾아내어 자기 나름으로 현실에 맞게 해석해 내거나 적용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배움은 지난날의 일일뿐이다. 학교에서든 연구소에서든 모든 배움은 지난날의 것으로 이루어진다. 미래학 역시 지난날의 것을 토대로 해서만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사람 중에는 미래를 정확하게 알아서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어떤 사람도 오직 아무도 미래를 알지 못한다는 전제 하에서만 미래학을 말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새것을 안다는 것은 지난날의 배운 것이 자기 자신에게 있어서 그것을 자신의 현실에 응용함이 끝이 없는 것을 말한다. 이런 학자의 생활을 분명히 다른 사람들이 본받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스승이 될 만하다. 단순히 과거의 내용들을 기록해두고 그에 대해서만 묻는 정도의 배움으로는 그 사람의 마음에 얻어지는 것이 없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안다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모든 배움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때에는 마음은 마음으로 통할 수 있고 마음으로 느끼는 것은 시공간의 제약을 그다지 받지 않기에 좁은 한계를 벗어날 수 있다.
‘온’은 ‘데우다’, ‘요리하다’등의 뜻도 가지고 있다. 모든 음식은 날 것으로 먹지 않는 한 모든 식재료를 데우거나 요리하는 형식을 통해 만들어진다. 각각의 식재료들, 예를 들어 파, 마늘, 생강 등의 식재료들과 과일, 고기, 생선 등의 동식물 등은 처음에는 제각각 독특한 맛들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일정한 시간과 일정한 온도에서 요리가 되면 이것들은 서로 함께 데워지면서 각각의 식재료들의 개별 맛들이 섞여지게 된다. 요리사의 개인 능력에 따라 이러한 식재료들은 모두 섞여져서 한 가지 음식으로 재탄생된다. 이런 음식을 끝도 없이 요리할 수 있고 동시에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 요리하고자 할 때 그는 요리 선생님이라 인정받을 수 있다.
군자는 스승보다 포괄적인 개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공자가 거의 일생에 걸쳐서 추구하고자 한 것이 군자 또는 군자의 인간상이기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스승은 군자가 보여야 할 모습 중에 하나다. 불기(그릇처럼 편향되어서는 안 된다)는 군자가 지녀야 할 모습 중에 하나다.
그릇은 각각 그 쓰임에 맞는 용도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사람이 그것의 용도와 다르게 사용하기 어렵다. 스승이나 군자는 덕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다. 그들이 찾고 이해하려는 것은 옛날의 덕이자 그것으로부터 오늘날에도 적용할 수 있는 덕이다. 옛날의 덕이나 오늘날의 덕을 풍성하게 이룬 사람은 분명히 그릇처럼 한 가지 분야의 덕에만 능통하고 다른 분야에는 통용이 안 될 수 없다. 진정한 스승 내지 군자라면 무슨 일을 하든지 간에 그 일에서 그 사람의 덕스러움이 배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선한 그리스도인이라면 공자가 말하는 스승이나 군자가 되어야 한다. 선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덕을 배우고 익히고 찾아야 하고, 그 말씀이 지니는 현대적 의미 역시 찾아내어 지금의 삶에 적용해야 한다. 대표적으로 마태복음 5장에서 7장에 이르는 산상수훈의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친히 구약의 계명 중심의 생활양식으로부터 새로운 시대에 살아야 할 그리스도인의 신앙의 자세를 가르쳐주고 있다. 이 말씀들은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 안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늘 깨우치고 현실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해야 할지를 드러내고 있다.
성경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1:45, 벧전1:16).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하나님의 거룩함을 먼저 배워야 한다. 그리고 새로이 자신의 삶 속에 실천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부족하더라고 죽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고 그를 의지하여 언제나 하나님의 거룩함으로 나아가야 한다. 핑계해서는 안 된다. 더 이상 예정론이나 인간의 전적 타락을 핑계 삼아 자기 죄를 합리화하거나 고정적으로 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일 수 없다. 선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이 자신이 부족하고 힘들고 지치더라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다 바쳐 하나님의 거룩함을 향해 날아올라야 한다.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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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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