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8-01-31 22:2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예를 물을 줄 알아야


林放問禮之本 子曰大哉問 禮與其奢也 寧儉 喪與其易也 寧戚
임방문예지본 자왈대재문 예여기사야 녕검 상여기이야 녕척
子曰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亡也
자왈이적지유군 불여제하지무야
季氏旅於泰山 子謂冉有曰女弗能救與 對曰不能 子曰嗚乎 曾謂泰山 不如林放乎
계시려어태산 자위염유왈여불능구여 대왈불능 자왈명호 증위태산 불여임방호
논어 3장 「팔일」(八佾)의 계속이다.

“임방이 예를 물었다. 공자가 대답하기를 ‘크도다! (임방의) 질문이여!’ 예는 화려하기보다는 차라리 검소한 것이 낫고 상(례)는 형식적이기보다는 슬퍼하는 편이 낫다.”
“공자가 말했다. 오랑캐의 나라에 군주가 있는 것이 (중국의) 제후국들에 군주가 없는 것만 못하다.”
“계씨가 태산에서 산천에 제사를 지냈다. 공자가 염유에게 말했다. ‘네가 (그 제사를) 구할(막을) 수 없었던가?’ (염유가) 대답하기를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공자가 말했다. ‘아! 일찍이 태산(의 신)이 임방(의 예)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가?’”
본문 역시 삼환(삼손)이 천자의 예를 자신들의 가정에서 사용한 것이 예가 아님을 비난한 것에 이어서 예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공자는 임방이라는 사람을 통하여 예의 문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임방은 노나라 사람으로 비교적 늦게 깨우치는 제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공자가 보기에 그 당시 사람들은 예의 근본에 대해서보다는 지엽적인 것들을 더 따르고 있었다. 그런데 임방은 근본의 예를 물었다. 그래서 공자는 임방의 물음이 위대하다고 한 것이다. 예라는 것은 남들에게 보이려는 듯이 사치스럽고 거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검소하게 해야 하고 특히 상을 당했을 경우에는 자기가 그 상례를 다스리는 자인 양 형식적으로 하기보다는(“易, 治也.”: 이(易)는 다스림이다) 스스로 슬픔을 지니고 감당하는 것이라고 교훈한다.
이적은 다 오랑캐다. 중화의 밖에서 예가 없이 살아가는 무례한 민족들이다. 그들에게 군주가 있다. 오랑캐조차도 상하의 예를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중화의 제후국들에는 군주가 없다.(“亡, 古無字通用”: 망은 옛날에는 ‘무’자와 통용했다) 다시 말하면 상하의 예가 없다는 것이다. 공자가 오랑캐의 민족조차 상하의 예를 지키고 있는데 중화의 제후국들에는 이러한 예가 없음을 탄식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보면 공자는 국수주의적 애국자(chauvinist)이기도 한 것 같다.
계씨가 태산에서 산천에 제사를 지낸 것은 천자처럼 참람하게 한 무례한 행위였다. 제후는 자신이 봉토를 받은 지역 안에서만 제사해야 하는데 자기 영역을 벗어나서 노나라 땅에 있는 태산으로 간 것이다. 군주만이 할 수 있는 제사를 계씨가 참람하게 사취한 것이다. 염유(BC 522-462, 冉求라고도 한다)는 공자 제자다. 이 당시 염유는 계씨 가의 가신으로 있었다. 그래서 염유에게 계씨가 태산에서 제사하는 일을 말릴 수 없겠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염유는 막을 수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공자에게 배웠으면 그대로 실천하는 의무가 염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태산은 그 당시는 물론이거니와 지금까지도 신령한 산으로 인식되고 있다. 공자는 계씨나 염유나 무례한 일을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태산의 신만은 임방이 예를 알듯이 그들의 무례함을 훨씬 더 잘 알고 있다고 마무리를 하고 있다. 태산의 신이 계씨의 무례한 제사를 받지 않을 것을 암시한 것이다.

본문의 주제는 예다. 예는 상하를 알고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이 기본이다. 자신의 분수를 아는 것이 예의 첫째다. 그런 다음에 상대를 알아야 한다. 상대를 알아야만 그 상대가 원하는 예를 취할 수 있다. 천신이든 지신이든 신과 관련해서도 자신을 알고 신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예에 맞는 제사를 지낼 수 있다.
그리스도인도 자신과 하나님 사이의 예를 알아야 한다. 칼뱅(John Calvin, 1509-1564)은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 1장 첫 구절에서 사람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자신을 알 수 없다고 설파하였다. 하나님을 아는 길은 성경을 읽는 것이다. 성경은 사람에게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 3:10)라고 가르친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 역시 성경에 있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신 11:13) “너희가 만일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잘 지켜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모든 도를 행하여 그에게 의지하면”(신 11:22) 이대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고 지켜 행하며 그분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예로 대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를 벗어나서 예배하는 것은 모두 참람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예를 벗어난 기도와 찬송 역시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예배는 먼저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고 그 후에 하나님의 명령을 청종하고 지키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어야 한다. 대한의 그리스도인들이여! 오늘날 처절하면서도 치졸한 자본주의 생활 양식에서 벗어나서, 그리고 인간 중심의 예배 양식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참 예배로 돌아가자. 하나님의 예를 따라 하나님을 사랑하자.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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