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군자의 다툼
子曰 君子無所爭 必也射乎 揖讓而升 下而飮 其爭也君子
자왈 군자무소쟁 필야사호 읍양이승 하이음 기쟁야군자
논어 3장 팔일의 계속이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다투는 것이 없다. 반드시 다투어야 한다면 그것은 활쏘기이다. 서로 읍을 하고 양보하며 활시위대에 올라가고 (활을 쏘아서 승패가 난 후에) 내려와서는 벌주를 마시는 것 그 다툼이 군자(의 것이)다.”
기본적으로 군자는 다툼을 만들지 않는다. ‘쟁’은 서로 손을 마주 잡고 자기 쪽으로 당기는 모양을 상형화한 글자다. 군자는 평소에는 다투지 않는데 꼭 다투는 것이 있다. 향사례에서 활쏘기 내기를 하는 것이다.
향사례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주에서 행사하는 향사례다. 『주례』 지관(地官) 향대부조(鄕大夫條)에 따르면 주나라 당시 지방 단위인 향(鄕)·주(州)·당(黨)·족(族)·여(閭)·비(比)가 있었는데 향사례는 주에서 담당하였다. 향대부가 국가의 법을 정월에 사도(司徒)로부터 가르침을 받아 그것을 주장(州長)에게 전수하면, 주장은 정월 중의 길일을 택하여 향사례를 행하였다. ‘사(射)’는 활을 쏘는 뜻이라기보다는 화살이 곧듯이 “그 뜻을 바르게 한다(定其志)”는 의미였다. 다른 하나는 『의례(儀禮)』 향사례조에서 보이는데, 주장이 춘추 두 번으로 예(법)에 따라 백성을 모아서 주서(州序: 州의 학교)에서 활쏘기를 익히는 것(習射)이었다.
이외에도 향음주례가 있었다. 향음주례는 지방 단위인 당(黨)에서 주관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향대부가 나라(고을) 안의 어진 사람을 대접하는 향음주례를 행함으로써 사회에 어른을 존중하고, 노인을 봉양하고, 효제의 행실을 높이기 위함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136년에 과거제를 정비하면서 공사를 중앙에 보낼 때 향음주례를 행하도록 규정하였는데, 보통 나이 많고 덕행이 높은 어른들을 대접하였다. 한편으로는 고을 선비나 양반들의 친목을 도모하기 위하는 목적도 있었다.
공자는 활쏘기를 통한 사족들의 모임에서 일어나는 일을 가지고 군자의 다툼에 관해서 설명을 하고 있다. 향사례에 모인 사람들이 모두 짝을 이룬 후에 짝을 지어 나가서 세 번 읍을 하고 각각 오른편과 왼편으로 사대(射臺, 활을 쏘는 단)에 오른다. 사대에 올라가서는 서로 다시 인사를 하고 차례대로 활을 쏘고, 활쏘기를 마치면 읍하고 내려와서 다른 짝들이 모두 내려오기를 기다린다. 마침내 이긴 자가 읍을 하면 이기지 못한 자가 올라가서 술잔을 잡고 서서 그 술을 마신다. 군자는 다투지 않는 것이 보통인데 기어이 다투어야 한다면 활쏘기에서의 상황처럼 그렇게 다툰다는 것이다. 공자는 이를 통해서 그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다투어야 하는지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 다툼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런데 다툼이란 대체로 자기 욕심만을 충족시키려 하거나 자기 입장만을 확보하려는 데서 일어난다. 자신의 욕심이 강하면 상대의 마음이나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기 어렵다. 자기 것만을 고집하는 것은 그 고집하는 사람의 면모를 드러나게 한다. 사소한 것이나 가치 없는 것을 위해 다툼을 벌인다면 그런 사람의 모습은 더욱 추해질 뿐이다.
다툼에서도 예를 드러낸다. 다툼을 통해서 인품의 훌륭함을 드러낸다면 평소 생활에서의 그 사람의 인품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감동적이다. 제대로 된 사람이라면 다툼에서도 예를 드러내야 한다.
사도행전 15장에는 바울과 바나바가 전도 여행을 떠나고자 하면서 마가 요한을 데려갈 것인가 말 것인가로 다툼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전도 여행을 나서면서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지 말자고 하였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가자고 하였다. 바울은 마가가 이전의 전도 여행 때에 불성실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헤어져야 할 정도로 심히 다투었다. 바울은 실라와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났고 바나바는 마가와 함께 전도 여행을 떠났다(행 15:36-41). 하지만 바울이 후에 인생의 말년에 이르러서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에 나타난 바에 따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올 것을 당부하였다. 마가를 데려와야 하는 이유는 마가가 바울 자신의 일에 유익한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바나바와의 다툼을 통해 그 후로 마가라는 사람의 진정한 면모를 보게 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가버나움으로 가는 도중에 누가 큰 자인지를 놓고 다투었다(막 9:33-34). 야고보와 요한 형제는 예수님에게 주님의 영광 중에 있게 될 때에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 달라고 요구하였다(막 10:35-37). 두 형제는 다른 열 제자를 상대로 자신들이 영광스러운 자리를 차지하고자 다툼을 벌였다.
그런데 베드로를 필두로 해서 열한 명의 제자들은 이후로는 다툼이 없었다. 우레라는 별명을 가졌던 요한은 사랑의 사도가 되었고 야고보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이들의 다툼은 예수님 앞에서의 다툼이었다. 이것이 믿는 자의 다툼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의 다툼은 반드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다툼으로 결론이 나야 한다. 전도를 위한 다툼이거나 하늘나라의 영광과 관련된 다툼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대한의 그리스도인들과 교회들이여!! 이제는 진정 하나님 나라를 위한 다툼을 열정적으로 펼쳐가 보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그 다툼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포용하여 더 큰 파이를 만들어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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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니체가 느낀 욕망: 서양 기독교가 날조하려는 본능! |
예를 물을 줄 알아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