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니체의 미래 여성관(3) : ‘희생’과 ‘헌신’에 속지 말라!
“남자들이야말로 여자들을 타락시킨다. 여자의 모든 결함을 개선하고 그 죗값을 치러야 하는 것은 남자들이다.”(니체, 『즐거운 학문』, 안성찬 외 역, 서울: 책세상, 2005, 134쪽.)
니체의 이 말을 얼핏 보면 남자들에게 책임과 부담을 지우는 듯하다. 그런데 여자들의 모든 결함을 만든 죄책이 남자에게 있다면, 여자의 결함은 남자들의 지배가 낳은 결과라는 사실도 얼마든지 유추할 수 있다. 여자들의 타락을 여자로서 자기 고유성에 대한 상실과 왜곡으로 이해한다면, 남자들의 죗값은 다름 아닌 여성의 본래 지위를 박탈하고 남자들의 자기 편리대로 여성을 부렸다는 의미가 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여성은 그러한 과정을 피할 수 없는 실존의 운명으로 지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런데 여성들이 남성들에게 자기 타락에 대한 보상 청구서를 요구하기 전에 먼저 진단할 것이 있다. 피해 보상비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회복해야 할 ‘여성’으로서 자기 모습이 어떤 형상(形象)인가하는 문제다. 회복해야 할 자신의 형상이 없다면 고귀한 헌신과 희생이라도 맹목적인 비애감으로 끝날지도 모른다. 이전 희생보다 더한 희생을, 이전 헌신보다 더한 헌신을 요구받을 뿐 자기 결함을 개선하기는커녕 자기 상실과 자기 학대만을 반복해서 강요받는 꼴이 될 것이다.
이러한 위험스러움을 니체는 이렇게 지적한다. “여성이 이해하는 사랑은 지극히 명백하다. 아무런 고려나 유보를 하지 않는 영육의 완전한 헌신(복종뿐만 아니라), 단서나 조건과 연결된 헌신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수치와 공포를 느끼는 그런 헌신이 여성의 사랑이다. 이처럼 조건이 없다는 점에서 여성의 사랑은 신앙이다.”(앞의 책) 세속화한 신앙은 마치 맹신과 확신 사이에서 제자리를 잡지 못하는 유령과도 같다. 여성 스스로 자기 굴레로 만들어가는 헌신이 신앙의 특성을 갖는다면, 자기 확신을 강화하는 만큼 맹신의 위험성도 가속화할 수 있다.
이 글 시작하는 인용에서 니체가 말한 ‘남성들이 여성을 타락시킨 것’은 바로 ‘영육의 완전한 헌신’이라는 이데올로기를 ‘계몽’이라는 미명으로 교묘하게 조장하여 그것을 ‘여성다움’으로 고착화한 악행을 저지른 점이다. 사랑의 행각에서 드러나는 수동적이거나 때로는 무능력하거나 더욱 종속적이고자 하는 여성의 약점을 ‘헌신적 사랑’이라는 허구를 조장하여 마치 여성만 가질 수 있는 불허의 능력으로 주입시켜왔다. 자기 행위에서 그것이 최악이든 최선이든 우선 자기 보호하기에도 역부족인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남성중심의 유럽 문화는 ‘여성의 힘’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조장하여 철저하고 체계적으로 여성의 헌신을 신격화하면서 동시에 희생 제물로 생을 마감해야 하는 비극의 여신으로 가공해 왔다. 니체는 “사랑으로 행해지는 것은 항상 선악의 저편에서 일어난다”(니체, 『선악의 저편』, 김정현 옮김, 책세상, 2009, 222쪽.)고 한다. 여성의 헌신과 희생은 그것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최선과 최악을 모두 포용할 수 있으며 그 결과 남성들에게 만족스러운 완벽한 희생물이 되도록 강요받은 것이 그 내막이 된다.
“여성은 사랑이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다고 믿고 싶어한다.-이것이 여성의 고유한 믿음이다.”(앞의 책, 294쪽.)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여성의 사랑은 모든 것을 해낼 수 있도록 강요받고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자리 잡았다. 그리고 더는 견딜 힘이 없어 자기 생을 마감해야 하는 순간도 ‘신적 사랑’으로 길들여 사랑이라는 이름에 드리운 음모의 실체를 모른 채 죽어가야 한다. 사랑 하나면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다고 믿고 생애와 목숨을 걸지만, 점점 길들여지고 최후에는 먹잇감이 되는 비극을 맞이한다.
이상과 같이 ‘헌신’과 ‘희생’에 속아 남성 중심의 희생양이 되어버린 여성의 ‘노예 같은 사랑’을 분석한 니체는 ‘사랑하는 법’을 이제 제대로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임을 지적한다. “나의 가르침은,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건전하며 건강한 사랑으로써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정동호 옮김, 서울: 책세상, 2000, 313쪽.)
그렇다면 니체가 말하는 건전하고 건강한 사랑이란 무엇이며, 그것으로 배워야 할 사랑은 어떤 것인가? 과연 그 실체가 있는가? 니체의 명제, ‘신은 죽었다’는 말을 떠올려 놓고 보면, ‘신 죽음의 시대’에 건전하고 건강한 사랑은 무엇이냐는 질문은 니체 자신의 처절한 몸부림이며 또한 그가 시대에 던진 과제이기도 하다.
성경에서 가르쳐 주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 중 하나가 하나님의 사랑과 이웃 사랑(눅 10:27)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사랑’이라는 주제에 대한 올바른 접근과 이해 즉 ‘여호와 하나님 중심의 사랑’을 아는 것으로만 건전하고 건강한 사랑에 도달하는 구원의 길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의 노래라는 칭송을 받고 있는 구약성경의 보고(寶庫)가 있다. 바로 ‘아가서(雅歌書)’다. 역사 섭리에 나타난 하나님 여호와의 영광과 능력과 사랑을 칭송한 ‘노래 중의 노래’(Song of Songs)다. 이 아가서의 주제가 바로 ‘자비성’이다.(박용기 저, 『의미분석 성경개론』, 성남: 진리의말씀사, 2005, 334~336쪽.) 절대적 가치인 신의 죽음을 말하면서 이제는 인간이 주체가 되는 건전하고 건강한 사랑을 찾고자 몸부림친 니체를 보면서, 우리는 사랑의 원천인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 무엇인지 성경진리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지혜가 더욱 필요함을 절감한다.
이 사랑은 많은 물로도 끌 수 없고, 홍수로도 쓸어버리지 못할 것이니 만일 사람이 자기 집의 모든 재산을 주고 사랑을 얻으려 한다면 그는 아주 비웃음거리가 될 것입니다 (아 8:7/바른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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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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