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니체의 미래 여성관(4) : 창조의 동력, 권력의지를 회복하라!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성직자의 본능에 자리 잡고 있는 적개심과 복수심을 고발한다. 니체가 볼 때 도덕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성직자 본능에는 삶의 견딜 수 없는 나약함이 지배한다. 즉 모순과 갈등, 대립과 투쟁의 긴박한 삶의 현실을 견딜 수 없는 부류의 나약한 떼거리들을 선동한 도덕적 성직자의 본능을 가진 자들이 생(生)을 강인하게 견디는 강한 자를 부러워하다가 결국 증오하게 된다. 자기의 나약함을 되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유약함의 원인을 강한 자들 탓이라고 단정한다.
삶의 패배자, 생의 부적응자들이 자신을 ‘착한 자’로 착각하고, 견디기 힘든 거친 삶을 남 탓하지 않고 견디는 강한 자들을 ‘악한 자’로 규정한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 ‘약한 자=선량한 자=도덕적 군자’라는 등식을 만들어 유포한다. 니체는 삶을 견딜 수 없는 약한 자들이 삶을 강인하게 견디는 강한 자를 향해 복수심을 품고 유약한 자들을 모아 패배하는 자신들의 행동규칙을 ‘도덕적 행위’로 둔갑시킨다. 강인한 자에 대한 시기심과 복수심이 타인을 대하는 기본자세가 되는 이러한 위선적 도덕을 니체는 ‘노예도덕’이라고 한다.
그런데 강한 자를 시기하거나 부러워하면서 점점 쇠약해지는 자신의 상태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의 약점을 위장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바로 ‘여성적 복수심’을 지배하고 있는 병적 징후가 그것이다. 니체가 볼 때 남성과는 질적으로 다른 여성의 고유성은 ‘임신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고유한 자기 가능성이 상실되면서 여성이지만 여성 노릇을 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정직하게 인정하지 않고 자기 결함을 남자들이 하는 행동을 모방하는 것으로 대체하려는 욕구가 발생한다.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부정하려는 행동 중에, 니체에 따르면, ‘여성 해방론’에 목소리를 높이는 경우가 그 예에 해당한다.
여성으로서 가장 자연스럽고 남자들이 결코 할 수 없는 것은 ‘자연적인 성적 사랑’과 그 사랑의 확증인 ‘임신’이라는 고유한 사실이다. 그런데 이러한 능력을 상실한 여자들은 자신의 자연적 사랑을 충실하게 따라가는 여성을 ‘애나 낳아주는 자’로 치부한다. 결함이 없는 온전한 여성을 남성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로 만들어간다. 니체가 볼 때, 현실에 대한 불만과 패배감과 상실감에서 생긴 증오심을 숨긴 ‘성직자적 복수심’과는 달리, 삶에 대한 여성의 복수심은 이렇게 자신의 ‘성적 결함’에서 출발한다.
회복할 수 없는 여성의 고유성을 상실한 여성은 이제 자신의 상실감을 위로해 줄 이데올로기를 조작한다. 여성의 ‘자연적인 성적 사랑’에 충실한 자들에게는 (필요)없는 ‘이상(理想)’을 만든다. 여성의 자연적 사랑을 역행하는 ‘반자연적 이상’을 지식화하고 진리처럼 체계화한다. 그리고 같은 종족이며 자기의 본성에 충실한 여성의 삶의 의지까지 왜곡한다. 니체는 여성의 본성을 의도적으로 배척하면서 조작되는 이데올로기와 그 지식의 왜곡 과정을 이렇게 지적한다. “한 여성이 학문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을 때, 그녀에게 성적인 결함이 있는 것이 보통이다. 불임이라는 것은 이미 어떤 유의 남성적 취향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니체, 『선악의 저편』, 김정현 역, 서울: 책세상, 2002, 124쪽.)
남성적 취향으로 향한다는 것은 여성들을 지배했던 남자들의 권력을 흉내내기가 세력화하기 위해 여성의 고유한 능력에 충실한 ‘아이를 잘 낳는 여자들’을 남자들에게 길들여진 여인들로 부정해 버린다. 그런데 이렇게 자기의 동류(同流)들을 부정하는 남성적 취향의 여자들은 남자들의 횡포 스타일을 자신들이 추구해야 할 이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여자들을 니체는 “가장 악의에 차 있는 ‘이상주의’ 족속”(니체, 『이 사람을 보라』, 백승영 역, 서울: 책세상, 2005, 386쪽.)이라 규정한다. 여성의 자기 능력을 포기한 결과, 남성 중심 즉 ‘애를 낳을 수 없는’ 남성의 특징이, 역설적으로, 여성의 이상이 되어야 한다는 억측을 만들어낸다. 반자연적 이상에 노예가 된 이러한 여자들은 “성적 사랑의 자연적인 부분, 성적 사랑에 대한 거리낌 없는 양심을 독살하는”(앞의 책, 같은 쪽.) 비열한 족속들이다.
간단히 말하면 여성의 타락은 여성 본래의 생물학적 조건과 능력과 성향을 스스로 포기하고 남성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스스로 모방하거나 혹은 타인에게 강요하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남녀평등은 남자들이 일삼는 탐욕과 폭력을 따라가는 데 있지 않고, 자기 본능과 성향을 회복하는 자기극복의 운동이어야 한다. 남자 스타일의 복장을 하고 남자들이 내지르는 폭언을 따라하고 남자들이 저지르는 추악한 형태의 권력을 따라간다고 해서 그것이 평등을 보장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남녀평등권을 향한 여성의 투쟁은 방향을 잃었다는 것이 19세기 말 니체의 문화 진단이다. 다시 말해 여성해방론자들의 평등권 회복운동은 투쟁이 가속화할수록 여성이 자기 자리를 찾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본성과 본능에 대한 자기긍정의 가능성이 더 사라졌다는 것이다. 니체의 지적이다. “자기네들을 ‘여자 그 자체’, ‘고등한 여자’, ‘여자 이상주의자’로 끌어올리면서 그녀들은 여자의 일반적 수준을 끌어내리고자 한다.”(앞의 책, 같은 책) 여성들이 인간으로서 자기 존중은 여성으로서 스스로 존중할 수 있는 남성의 본성과 ‘구별되는 자기 입지’를 회복하는 데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니체는 남녀의 ‘평등화’보다 ‘불평등함’을 더욱 상기시켜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니체의 이러한 평가를 보며 우리는 ‘기독교적 여성관’의 정립이 시급함을 또 절감한다. 하지만 성경적 토대가 거의 없는 한국기독교 문화를 생각하면 성경적 여성관을 수립하기에는 그 길이 너무 멀다. 니체의 우려가 더 가속화할 것이라는 짐작과 함께 여성으로서 가장 먼저 서둘러야 할 일이 성경진리에 토대를 둔 여성관 정립이 어느 시대보다 더 시급한 과제임을 절감한다.
여자가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머물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다(딤전 2:15/바른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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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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