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앎을 지극히 하기 위해서는
앎을 지극히 하기 위해서는
所謂致知在格物者 言欲致吾之知 在卽物 而窮其理也.
소위치지재격물자 언욕치오지지, 재즉물 이궁기리야.
“소위 앎이 (사)물을 바르게 하는데 있다는 것은 자신의 앎을 끝까지 하고자 하는 사람이 (사)물을 마주하고서 그것의 이치를 전부 헤아려 내는데 있다는 것을 말한다.”
蓋人心之靈 莫不有知 而天下之物 莫不有理.
개인심지영 막불유지 이천하지물 막불유리.
“대체로 사람의 마음은 신령해서 (근본적으로) 앎이 없는 경우가 없고 천하의 물들은 (그 나름의) 이치를 갖지 않은 것이 없다.”
惟於理有未窮, 故其知有不盡也.
유어리유미궁, 고기지유부진야.
“그런데 (사람이) 이치를 헤아림에 있어서 아직 다함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삶의 앎에 다하지 못함(완전히 꿰뚫지 못함)이 있는 것이다.”
본문은 대학 전문 5장의 내용 중 일부이다. 원래의 대학 본문에는 출전하지 않는 내용인데 주자가 정자의 주장을 참고하여 그 자신이 설명해 넣은 보론(補論)이라 할 수 있다.
이 내용을 간단히 말하면 누가 세상의 이해를 가장 근원적이면서 바르게 해 낼 수 있겠는가를 밝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유학에서는 공부하는 자는 누구나 이러한 앎의 경지에 이르러야만 ‘수신’(修身-자신을 닦은 사람)의 사람이 될 수 있고 ‘치인’(치인-다른 사람을 다스림)의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지극한 앎에 이를 수 있는 근거는 인생들이 모두 신비로운 마음을 지니고 있어서다. 사람의 마음은 신령해서 태어나면서부터 모든 사태에 대한 앎이 가능하다. 마음은 만물을 지각하고 느끼고 분별해 낼 수 있다. 한편 만물은 그것이 존재하는 순간부터 그 나름의 존재 이치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하늘에서 부여받은 이치대로 존재하고 존재해 가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에 따르면 사람과 만물이 함께 어우러져 전개되는 세계이기에 사람의 신령한 마음과 만물의 이치가 서로 교감을 이룬다는 것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當然之事, 당연지사)이 된다.
유학의 논리적 구조 안에서는 사람은 순연한 본성의 마음을 지니고 태어나고 사물 역시 하늘이 준 나름의 이치를 가지고 생겨나기에 서로 완전한 교감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러한 완전한 교감의 수준, 그러니까 하늘과 덕이 합하고 땅과 덕이 합하고 모든 세상의 변화에 대하여 그 앎이 합하는 자는 오직 성인만이 가능할 수 있다. 성인은 후대에 와서는 군자로 이해되었다. 성리학적으로는 이기의 완전한 조화를 이룬 자가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완벽에 가까운 유학적 논리 구조 안에서 성인이 되는 사람들이 그토록 적은가. 주자는 사람들이 물의 이치를 따져가는 과정에서 그에게 주어진 하늘의 마음 그대로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말하자면 어떤 사물에 대한 이치를 구할 때 끝까지 온전하게 해내지를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로 사람의 앎에는 무언가 모자람이 생기고 만다. 유학에서는 성인이 아닌 한 사람의 앎이란 늘 모자라는 분량의 것이며 그 이유는 그 사람의 궁리가 뭔가 부족해서다.
하지만 냉정히 말해서 이 논리는 억지다. 그 이유는 유학에서 말하는 하늘이 너무 넓게 말해지기 때문이다. 즉 유학의 하늘은 우주이기도 하고 자연이기도 하고 경전이기도 하고 과거 성인들의 삶을 지칭하기도 한다. 그것은 주역에서는 태극으로 나타나고 있고 성리학에서는 이와 기, 또는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으로 드러나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이 하늘의 이치를 따라 사물의 궁극적 본성을 알아가기에는 너무도 많은 변수가 생겨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그 누구도 하늘의 이치에 맞는 그에 부합하는 말 그대로 완전한 너와 나의 하나 됨의 이해는 불가능한 것이다. (이 한계를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유학이 나름 제시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문제가 있다. 다음 호에서 계속)
기독교는 다음과 같이 본질을 아는 지혜(식)가 무엇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잠언9:12) 여호와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이시고(창1:1,) 그분의 외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분이시다(요3:16).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말하는 모든 지식의 근본은 이 하나님을 경외하며 알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요약하면 기독교에서 말하는 모든 지식의 근본은 창조주 하나님과 구속의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데 있는 것이다. 기독인이라면 이 앎을 온전히 하기 위해 온 마음과 온 몸, 온 힘과 온 능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교육학 박사, 백석대 외래교수) |
니체 이후의 ‘좋은 책’: 성경 해체의 작품들! |
근본의 앎을 지향하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