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인간의 존재 방식과 하나님의 저주 방식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방식을 ‘실존(實存)’이라고 말한다. 즉 실존이라는 방식으로 존재한다는 말이다. 실존이 방식이라는 말은 본래 고유한 것이 있고 그 고유한 것이 드러날 때 특수한 방식으로서 ‘실존’을 갖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실존이라는 특정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존재가 있는데, 바로 인간이며, 이러한 존재를 하이데거는 ‘현존재’라고 부른다.
현존재는 특정한 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더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로서 바로 인간이다. 이러한 존재 방식은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그것을 그대로 따라야만 하는 변경할 수 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하이데거에 따르면 이러한 변경할 수 없는 구조는 억압이나 구속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구조는 구체적인 판단을 내리며 살아야 하는 존재인 인간에게 살만한 이유와 살아야 하는 정당성을 주기 때문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 방식은 물론 인간의 존재방식이다. 그 존재방식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지난 호에서 살펴본 것처럼) 인간은 ‘이미’ 자기존재의 근원을 자기 내면에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 내막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생각하는 모든 인간에게 가장 분명한 것은 ‘어쨌든 무엇인가 있다는 것(Being, 존재)’이다. 인간의 모든 생각은 이미 어떤 대상에 대해 자신에게 이미 마련된 체험을 반드시 전제로 한다. ‘신’이라는 개념에 대해 무신론자이든 유신론자이든, 부정하든 긍정하든 상관없이 이미 선입견을 가지고 있으며 그 결과 무신론으로 혹은 유신론으로 드러난다.
하이데거의 다음 말, ‘자기 자신에 앞서 자신의 세계 곁에 이미 있음’(하이데거, 논리학, 까치, 240쪽)은 인간의 특수한 존재 방식을 표현한 것이다. 즉 자신이 경험해 본 적은 없지만 반드시 존재하고 있는 세계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라 생각하는 인간에게는 누구나 예외 없이 적용되는 존재 방식이다. ‘창조의 기원’을 말하고 ‘종말 이후’를 말하는 것은 하이데거에게 당연한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세상을 말하는 인간은 ‘이미’ 세상의 처음과 마지막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에게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현현(顯現)’과 같은 초자연적 사건은 이미 인간이 이해한 것에 대한 평가일 뿐이다.
하이데거가 말하는 현존재는 이처럼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이미 가지고 있는 방식인 초월적 구조를 가지고 있다. 나아가 이러한 존재 방식의 또 다른 중요한 특징은 타인(他人)이란 존재에 대해 분명히 의식 한다는 것이다. 즉 누군가와 반드시 관계를 맺고 살아가야 하는 필연성이다. 만났기 때문에 비로소 타인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은 이미 자신의 외부에 있는 존재에 대한 동경과 필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자기 존재의 근원으로 향할수록 다른 존재와 이미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고 본다. 이것이 현존재의 존재 방식에 두 번째 중요한 특징이다.
하이데거가 ‘이미 앞서 곁에 있음’(앞의 책, 247쪽)이라고 말하는 것은 근원을 생각하는 인간은 누구나 경험 이전의 세계를 전제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전체의 한 부분인 그 무엇에 대해 이미 관계를 맺고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면에서 하이데거는 고립된 자아라는 의미인 ‘고유한 자기 자신’의 존재라는 말에 반대한다. 왜냐하면 자기 자신의 고유성을 찾아간다는 것은 세계 내에 이미 존재하는 상호소통(함께 나눔, Mitteilung/communication)의 필연성을 알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이미 존재의 근원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는 가능성을 내면에 가지고 있는 존재이며, 동시에 다른 것들과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실을 철저하게 자각한 존재다.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존재방식을 알아가는 것이 ‘학문적 인식의 진보의 의미’(앞의 책, 242쪽)라고 한다.
하이데거의 ‘이미 있을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한 발언이 현대 기독교에 미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근원적 존재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는 그의 말은 (하나님의 말씀과 같은) 신적 계시의 필요성을 없애 버렸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신의 말씀으로 믿는 자들에게는 인간이 ‘이미 다른 존재의 필연성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반박한다. 이쯤이면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같은 형제로 선택했다’는 말은 정신 나간 소리가 된다. ‘신의 죽음’ 이후 하이데거는 신이 죽은 자리에 인간이 어떻게 그 자리를 차지해야 하는지를 탐문하고 있다. 다윗의 다음과 같은 고백에 아랑곳없이.
시10:4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하며 그의 모든 사상에 하나님이 없다 하나이다
<다음 호에는 ‘초월적 본성에 내려진 심판’을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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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시간성의 저주, 초월 본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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