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헛소리’와 침묵 사이의 방황
현대의 언어철학자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과학의 경우 인물로 보면 갈릴레이에, 방법으로 보면 연금술에 비교된다. 그의 등장으로 서양철학의 정체성과 사유 방법이 혁신적으로 바뀐다. 이제까지 서양철학은 대게 (비경험적인) 형이상학적 명제를 통해 사상의 체계를 세워가는 것을 고유한 일로 보았다. 그런데 비트겐슈타인은 형이상학적 명제들이 올바른 명제일 수 있느냐를 따진다.
만약 진리판단이 가능한 명제가 아니라면 모든 체계는 허구가 된다. 형이상학과 윤리학, 미학과 종교 분야에서 이제까지 의미있다고 여기며 진술했던 모든 형이상학적 가치들은 ‘헛소리’(nonsense)가 된다. 그렇다면 비트겐슈타인이 말하는 명제의 기준은 무엇이며 이러한 명제를 사용해 어디까지 말 할 수 있는가? 나아가 명제를 통해 말할 수 있는 것과 말할 수 없는 것의 경계는 어디인가?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의 문제들이 언어 논리의 오해에서 기인한다고 본다. 언어 논리의 오해란 명제를 제대로 사용하지 못해서 생기는 문제다. 그래서 언어 사용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 언어 논리의 오해를 해소하는 최선의 길이다. 언어의 구조는 논리적 구조를 말한다. 그리고 논리적 구조에는 인간이 관계를 맺고 있는 전체로서 세계가 묘사되고 있다. 그래서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이란 세계의 반영이다”(논리철학논고 6.13. 이하 ‘논고’로 줄임)고 말한다.
그가 보기에 논리적 탐구는 지식의 기초이며 세계에 속한 사건과 사물의 본성을 연구하는 시도다. 세계 질서와 인간의 정신이 만나는 곳이 바로 논리적 탐구 영역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세계는 사물의 총체가 아니라 사실들의 총체”(논고 1.1)라고 할 때, 이 말은 세계는 반드시 언어의 논리적 구조를 통해서 구축된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런데 논리의 정확성은 근본 한계가 있다. 그것은 수학 문제를 풀어나갈 때 수와 식의 갖가지 공리들을 전제하듯이 논리의 정확성도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의 ‘요청’이 된다. 이 요청은 경험할 수 없는 요소이지만 그 대상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전제해야 한다. 경험할 수 없는 요소이지만 논리적으로 확신할 수밖에 없는 언어 구성물인 명제를 비트겐슈타인는 ‘요소명제’(elementary proposition)라고 부른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요소명제를 완전히 분석할 수 없고 그 해당 예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요소명제들은 언제나 존재하며 또 그와 같은 것들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선험적(先驗的)으로 확신했다. 이러한 사실을 비트겐슈타인은 “논리학을 적용하게 되면 어떤 요소명제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나 논리학은 무엇이 그 적용에 속하는지 예측할 수 없다”(논고 5.557)고 한다.
요소명제에 대한 확신은 이 요소명제에 상응하는 궁극적인 사실이 분명이 있다는 주장을 하게 한다. 이를 “원자적 사실”이라고 한다. 더 이상 분해할 수 없는 사실은 (경험과 무관하게 논리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요소명제의 반영이 된다. 이러한 논리적 차원에 대한 비트겐슈타인의 확신은 다음 말에 잘 나타나 있다. “만일 하나의 요소명제가 참이라면 원자적 사실은 존재한다. 그리고 요소명제들이 거짓이라면 원자적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논고 4.25) 비트겐슈타인은 우리의 감각 기관으로 사실 확인은 할 수 없지만 분명이 세계 안에 존재하는 사실에 대해 확신한다.
그런데 원자적 사실을 서술하는 요소명제들은 수학적 함수관계를 형성한다. 수학적 함수관계란 경험세계의 사실들이 일정한 관계를 통해 세계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경우 경험 밖의 요소는 존재할 수 없다. 다시 말해 요소명제들을 통해 표현되는 모든 사실들은 형이상학적 것들이 아니라는 점이다. 비록 감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명제는 세계 내에서 경험되는 사실들이다. 인간이 사용하는 명제에는 형이상학적 가치를 결코 담을 수 없다. 이러한 의미에서 윤리학과 미학, 예술과 종교의 명제들은 언어를 통해 언어의 한계를 초월하려고 하기 때문에 ‘헛소리’(nonsense)가 된다.
이제까지 서양 철학의 명제들은 거짓이기 이전에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을 함부로 말한 ‘헛소리’였다. 비트겐슈타인이 보기에 대부분의 명제들과 물음들은 언어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나타나고 있다. 인간의 요청과 논리적 형식으로 이루어진 명제를 마치 실재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한 것이 서양 형이상학의 언어들이었다. 형이상학과 윤리학, 종교와 예술의 언어들은 명제로 보여줄 수 없다. 즉 어느 것이 선이고 악이며, 무엇인 절대이고 상대인지, 무엇이 더 아름답고 행복한 것인지 등에 관해서는 명제로 나타낼 수가 없다. 명제의 침묵 속에서 단지 짐작하여 ‘볼’ 뿐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서양 철학이 과장한 언어와 침묵 너머의 세계에 시선을 두고 있다. 그 경계에 서서 함부로 그 세계를 서술하고자 하는 시도를 좌절시킨다. 그렇다고 그 너머의 세계가 기독교에서 말하는 초월적 세계도 아니다. 그것은 사도 바울의 지적처럼 인간 욕망에 의해 고대 그리스인들이 맹신했던 ‘알지 못하던 신’(행17:23)의 세계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다음 호에는 ‘의사소통의 이성(理性)과 사이비 진리’를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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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철학은 지옥이다 !” |
하나님의 죽음에서 ‘성경의 죽음’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