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3-02-04 23:1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한 생각, 세계 지배욕 !


어떤 사물에 대해 값(價値)을 매기는 것은 이미 평가를 전제로 하며, 가치 평가를 내린다는 것은 그 무엇도 본래의 순수성을 고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전제한다. 그런데 에마뉘엘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에 따르면, 이러한 가치평가가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나기 전 이미 그와 관련된 생각에서도 이미 시작된다. 그는 󰡔존재에서 존재자로󰡕(서동욱 역)에서 이러한 사실을 이렇게 말한다. “관조(觀照)는 이미 행위의 요소이다.”(p.74)
서양 문화에서 관조(contemplation)의 의미는 그리스어 테오리아(theoria)에서 비롯한다. ‘바라본다’는 뜻의 이 개념은 명사로는 ‘구경(거리)’ 혹은 ‘광경’이라는 뜻이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주전 384~322)는 테오리아를 윤리적 행위(실천)인 프락시스(praxis)와 제작(창작) 기술인 포이에시스(poiēsis)와 대비시켰다. 간단히 말하면 관조란 감각적 경험을 배제한 영혼의 순수한 사유 활동이다. 무한불변의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형이상학이나 수학과 같은 학문을 통해 이루어지는 정신 활동을 말한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맥락에서 관조를 의지와 행위의 관점에서 더욱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관조를 윤리적 실천이나 창작 활동과 구분해서 사용하고자 했다면, 레비나스는 이러한 구분과 차이보다는 관조가 갖는 활동성의 의미를 강조한다. 관조를 행위로 보는 그의 시각에서 보면 관조는 삶에 대한 근본적 의지와 욕구에 관련된다. 이는 생각하는 주체가 ‘이미’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세계와 연루되어 있다는 필연성으로 향하도록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인간이란 이미 무한한 자기 세계를 만들고 있는 존재다.
의식하든 그렇지 못하든 이미 자신은 스스로 창조한 세계를 가지고 있다. 생각하고 살아간다는 것은 이미 숨겨둔 자기 세계를 다시 경험하고 완성해간다는 뜻이다. 욕구가 지향하는 바가 있다는 현상이 의미의 원천이며 지향하는 바 너머 그 이상의 무엇을 남겨둘 필요는 없다.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탐구하는 것은 태양 빛이 쬐임으로 세계가 드러나듯 지성의 ‘빛’에 의해 인간 내면의 세계가 드러난 것이다. 그것은 본래부터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것이었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요약한다. “조명을 받은 것은 이해된 것, 즉 우리로부터 오는 것이다.”(p.77)
자기 자신이 드러난 세계는 단지 자기 세계만은 아니다. 세계는 언제나 관계를 통한 ‘전체’로서 의미를 갖는다. 겸손하게 자신의 생각을 조심스레 말하는 자의 세계와 과장되게 부풀려 말하는 자의 허구의 세계에서 그 차이는 본질적으로 밝히기는 어렵다. 각자 자기 지성의 빛으로 의미를 부여하는 만들어진 세계는 ‘영원무궁한 천국’인 셈이다.
“주체에 대한 대상의 관계는 대상 자체와 동시에 주어진다”(p.77)고 하는 레비나스의 말에서 우리는 ‘인간은 곧 세계 창조자’라는 등식을 유추할 수 있다. 인간의 인식 범위는 전체인 세계를 지향한다. 미미한 사건 하나라도 세계 전체와 연관된다. 그래서 선악을 아는 과일 하나를 따 먹고자 하는 행위는 창조주가 만든 모든 세계에 대한 주권을 찬탈하려는 행위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레비나스는 존재 전체에 대한 인간의 이러한 지배 메커니즘(mechanism)을 인간 내면에서 찾고자 한다. 바로 인간에게서 결코 없앨 수 없는 비전(vision)이라는 “자유에 대한 느낌 혹은 환상”(p.81)이 그것이다. 전체로서 세계와의 필연적 관계 맺음은 인간 자신이 ‘원해서’ 얻은 바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보편적 운명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근본적 정감(情感), 그것이 바로 자유라는 느낌의 환상이다.
인간의 자기 중심성은 반드시 세계 지배로 향한다. 이 세상으로 던져진다는 것이 바로 자기 삶의 지배자가 자기 자신이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삶의 주인으로 태어나는 상황을 우리는 일반적으로 인간의 고유한 가치라고 하며 그 능력을 개발해야 한다고 한다. 아무도 이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되물어야 한다. 그런가? 그렇다면 다윗의 고백은 거짓인가? 노아 당시 인류를 평가하는 하나님의 판정은 오판이고 억측인가? 세계와의 필연적 관련성을 설명하려는 레비나스를 보며 우리는 분명히 더 본질적인 물음을 물어야 한다. 나는 이 세계 속에 어떤 존재로 태어났는가?

 보소서, 내가 태어날 때부터 악하였고
내 어머니가 잉태할 때부터 죄가 있었습니다.(시 51:5/바른성경)
여호와께서 그 땅에 사람의 죄악이 많고 그 마음에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하기만 한 것을 보셨다.(창 6:5/바른성경)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한 느낌, 신성(神性)에 대한 반항 !
‘자기 한계를 안다’는 오만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