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공자의 평소 생활
子之燕居 申申如也 夭夭如也.
자지연거 신신여야 요요여야.
『논어』 「술이」의 계속이다.
“공자가 한가로이 계실 때 (그 모습은) 활짝 폈으며 온화하였다.”
‘연거(燕居)’는 “한가하게 아무런 일을 하지 않고 있을 때(閒暇無事之時)”를 말한다. ‘신신(申申)’은 (몸과 마음을) 활짝 편 것이다(其容舒). 사람들은 한가하게 지낼 때에 게으르게 있거나 방자하게 있는 것이 보통이다. 혹 엄숙하게 있을 경우라 하더라도 그 모습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고 좀 억지스럽고 지나치게 엄숙하게 한 것이기 쉽다. 이렇게 억지로 엄숙하게 할 때에는 ‘신신과 요요’라는 말을 사용할 수 없다. 그러한 태도들은 중용과 조화됨과는 거리가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제자들은 그들의 스승이 한가하게 지낼 때에는 어떻게 지내는지를 종종 지켜보았던 것 같다. 그들은 스승이 자신들을 가르치지 않는 때에도 늘 곧게 몸을 펴고 그 자세를 흩트리지 않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의 당당하고 바른 자세는 그것으로만 그치지 않고 온화함 역시 곁들여 있었다. 제자들은 그러한 모습을 신신과 요요로 표현하였다. 정자(程子)는 공자의 신신과 요요를 성인만이 스스로 지닐 수 있는 ‘중용과 조화의 기운(中和之氣)’으로 설명하였다.
사실 스승들조차 평소의 생활에서는 나태하거나 방자하게 지내는 경우가 흔하다. 좀 심한 경우에는 가르치고 있을 때에도 그러한 삶을 보이는 스승들이 꽤나 있다. 이와 반대로 훌륭한 삶의 태도를 보이는 스승의 경우 그 태도가 의도적이고 억지로 꾸민 것일 때가 많다. 혹은 지나치게 근엄하게 해서 가장되는 경우가 많다. 보통의 사람들이나 스승들은 그들만의 한가한 생활을 할 때에 중용과 조화를 이룬 모습을 보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은 개인의 경우든 여러 사람을 대표해서든 공식적인 생활과 사사로운 생활을 피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사람은 특히 스승은 중용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생활을 실천하려 해야 한다. 중용과 조화의 삶은 성인은 물론 누구나 추구해야 하는 가치이자 덕(목)이기 때문이다. 공적 생활이든 사적 생활이든 그 중용을 지키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전 생활과도 조화를 이룰 수 있어야 한다.
유학에서는 학자의 ‘신독(愼獨)’을 유달리 강조한다. 신독이란 홀로 있을 때를 삼간다는 뜻이다. 즉, 학자가 혼자 한가롭게 또는 개인적인 여유를 누리는 때에라도 자신의 마음과 몸을 신중하게 살펴서 도리에 맞게 해야 한다. 물론 공자의 신신과 요요와 비교하면 신독은 좀 억지스럽게 자신의 생활을 신중하게 하려는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신독 역시 신신과 요요를 모든 학자들에게 공적인 생활에서든 개인적인 생활에서든 도리에 맞는 삶을 살아가도록 요구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공자의 평소 생활의 자세는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평소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엿볼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릴 때와 교회 밖에서 자기 생활을 할 때에 그 삶의 태도가 크게 다르다는 것은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때와 성경 볼 때와 그렇지 않은 때의 삶에서 겉과 속이 다르듯이 다르다면 거기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모두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다(롬 14:8). 어떤 인생도 스스로를 위해 죽을 수 없으며 스스로를 위해 살 수도 없다(롬 14:7). 이것이 진리이기에 어떤 그리스도인도 그리스도와 떨어져서 살 수 있는 삶이 있을 수 없다. 이것이 팩트다. 이 팩트는 결코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당연히 그리스도만을 푯대로 하고 그 푯대를 따라 살아야 하고 그 푯대를 향해 나아가는 생활을 해야 한다. 이러한 삶에만 인간의 억지가 아니라 말씀에 따른 자유와 평안의 생활이 펼쳐질 수 있다. 이러한 삶에는 여유가 있고 풍성함이 있다.
기억할 것은 이러한 삶을 살았다 하더라도 우리에게 얻어져 우리 안에 쌓여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푯대를 향해 가는 삶의 지향점이 하늘나라에 있기 때문에 세상에 지금 쌓여 있는 것은 그저 그런 것에 불과하다. 바울 사도는 이를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라고 하고는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라고 선언하였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이여! 우리도 우리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상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날마다 달려가자(빌 3:13-14). 그렇게 하는 것이 교회 안에서의 삶과 교회 밖에서의 삶, 하늘나라의 일과 세상에서의 일을 종합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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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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