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언어로 만들어어진 가장 큰 속임수: 존재
하이데거는 ‘존재의 철학자’로 불린다. 존재란 ‘신’과 같은 궁극적이며 본질적인 대상을 말한다. 이렇게 볼 때 하이데거를 유독 존재의 철학자로 명명하는 것은 거부감이 생긴다. 왜냐하면 서양철학사 2500여년 동안 철학자라면 누구나 ‘존재’를 문제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특별히 하이데거를 ‘존재’의 대가인 양 말하는가?
그 이유를 간단히 말하자면 하이데거가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이 특이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제까지 거론된 존재에 관한 수많은 논의를 전체적으로 문제 삼는다. 존재에 관해 수없이 논의한 것이 존재 문제를 해명하는데 도움을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왜곡하고 잊혀지도록 하는 원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존재에 관한 이야기들이 보태질 때마다 그 본질이 드러나기는커녕, 오해와 착각만 더 늘어나도록 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그렇다면 그는 존재문제를 어떻게 취급했기에 존재의 대가(?)로 불리는가?
하이데거는 우선 존재를 초월적이면서도 내재적인 문제로 이해한다. 하지만 비중을 둔다면 내재적인 특성이 강하다. 인간의 사유를 통상 내적 현상이라고 본다면, 존재는 초월적 사건이기 전에 철저하게 인간 내면에서 발생한다. 이렇게 보면 신과 같은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존재는 인간 사유와 더불어 생기거나 혹은 사유의 결과물이 된다. 하이데거의 중요한 지적이 바로 이러한 여기에 있다.
존재가 사유의 결과이며 조작된 대상이거나 경험의 대상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는 마치 순수하고 객관적인 것으로 착각했다. 절대적이며 객관적 대상으로 믿거나 거론했던 존재인 ‘신’은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일그러져 있다. 하지만 아직도 그 형상은 변하지 않는 대상으로 남아있다고 억지를 부리며 맹신하는 자들 있다는 게 큰 문제이다.
이렇게 비판함으로써 하이데거가 존재 문제 자체를 무시하려는 것은 분명 아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생각을 잘못함으로써 생각의 주체인 인간의 본래 형상이 손상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인간의 형상 회복을 위해 그가 역점을 두는 것이 언어 행위다. 이제까지는 언어를 통해 존재를 너무 경박하게 다루었다는 것이다. 좀 더 깊게 이해하자고 호소한다. 언어를 통해 존재가 드러나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이 존재는 드러나면서 동시에 숨겨지는 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숨겨진다는 것은 불명확하거나 약화된다는 것이 아니라 보존된다는 뜻이다. 보존 내용은 물론 존재이다. 존재가 정체불명으로 숨어버리는 듯하지만, 하이데거는 이러한 언어의 이중적 특성이 존재를 복원하고 인간의 형상을 회복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고 본다.
하이데거는 그의 주저인 존재와 시간(365쪽)에서 인간을 특별히 ‘말을 하는 존재자’라고 규정한다. 그 이유는 말(die Rede)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곧 존재의 올바른 이해이며 나아가 인간의 본래 형상을 회복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되기 때문이다. 인간이 사용하기도 하지만 인간을 통해서 구체화되는 말의 규칙들(언어 논리)과 관련해서, 하이데거는 ‘해석’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는 “해석은 모든 인식의 근본형태이다”(앞의 책, 359쪽)라고 한다. 다시 말해 텍스트에서 의미를 이끌어내는 해석은 인식 과정에서 필연적이며 근본적인 사건이라는 말이다. 여기에서 진리 자체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이 불가능성을 가능성으로 보려는 시도를 한다. 불가능하다는 것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숨겨져 보존된다는 뜻이다.
하이데거에게 숨겨지는 것은 부정적 현상이 아니다. 해석을 통해 그만큼 더 도달할 수 있고 도달해야 하는 본질이 분명히 남아 있다는 희망이다. 이해된 만큼 인간을 통해 존재의 진리가 더 드러나면서 인간의 형상은 회복된다. 그리고 일단은 해석 작용으로 존재의 진리가 오해될 여지도 있고 숨겨지기도 하지만 동시에 무한한 해석의 가능성도 보장해준다.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통해 인간은 존재의 주체임을 보장받는다.
그러나 인간 중심적인 의미부여인 해석은 어디까지나 인간이성을 혼잡하게 해서 심판 아래 가두어 버린 하나님의 진노다. 언어를 통해 존재 의미를 부여하는 해석을 하면 할수록 본질에 다가가는 것이 아니라 진노를 쌓을 뿐이다.
창11:6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그들이 한 백성이며 모두 하나의 언어를 가졌으므로 이것을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이 하려는 모든 일을 막지 못할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에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이 서로의 언어를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9 여호와께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였으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불렀으며, 그곳으로부터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다.<바른성경>
<다음 호에는 ‘언어로 만들어지는 또 다른 속임수: 양심’을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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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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