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시간적 존재에 내려진 저주
하이데거는 인간을 현존재라고 한다. 더 분명하게 말하면 현존재(現存在)가 인간의 근원이며 전부라는 말이다. 현존재는 시간과 관련해서 구체적으로 자기 목적을 실현하며 살아가고 있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시간 구조 속에 그때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반성하면서 궁극적 의미가 자신에게 있음을 확인하는 존재다.
시간(時間)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흐름 가운데 특정한 어떤 지점 사이를 일컫는말이다. 이러한 시간 구조 속에 현존재의 존재 방식이 결정된다. 구체적으로 자기 목적을 실현해야 한다는 취지에서 보면, 유동적 시간성(時間性)보다는 일정한 패턴으로 정형화된 시각성(時刻性)이 존재방식을 결정한다. 이렇게 보면 현존재로서 인간이란 언제나 어떤 시점(時點)에서 자기 존재의 확실성을 확증하는 존재가 된다. 인간을 어떤 시점에서 시각화(時刻化)한다는 것은 관련된 시간 계열을 따라 자신의 존재가 결정된다는 뜻이다. 관련된 사건의 계열 속에 있다는 말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경험이라는 것도 반드시 이미 어떤 ‘세계’라는 전체 구조 안에서 경험하고 있다는 말이 된다. 이런 점에서 시각화(視覺化)의 존재는 이미 자기 존재의 근거를 시간 이전의 차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인간은 자기 목적의 실현에 대한 시간 이전의 초월적 근거를 내면에 스스로 마련한다.
특정한 시각(時刻)에서 이해되는 존재는 생각의 구조상 시간 이전의 차원을 논리적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인간 존재를 ‘이미 구성하고 있는’ 구조가 있다는 말이다. 시각(時刻)마다 구체적으로 자기 목적을 실현하도록 하는 경험 이전의 선험적(先驗的) 틀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뜻을 담아 하이데거는 현존재의 구조는 ‘세계 곁에 이미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점은 변할 수밖에 없는 유한한 인간이지만 늘 무한한 가능성을 꿈꿀 수 있도록 하는 가능성으로 남는다. ‘항상 이미 어디서나 존재하는 가능성’으로 실존하는 존재, 그가 시각화(時刻化)를 통해 존재하는 현존재로서 인간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자신보다 한 세기 앞서 존재했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위대함도 바로 이러한 사실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칸트는 도덕 형이상학의 정초에서 인간이란 “자신의 현존재 자체를 하나의 절대적 가치로 가지는 어떤 것”(하이데거, 논리학, 226쪽)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여기서 말하는 절대적 가치는 인간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로 만들어주는 원천이 된다.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절대 명령을 구체적으로 내릴 수 있는 (양심과 같은) ‘곳’이 바로 인간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곳’은 시간화를 가능케 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즉 생각하는 인간의 고유한 본질은 분명한 의미를 규정하는 특정한 순간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현존재(現存在)는 시각화(時刻化)를 통해 이미 시간을 초월한 차원에서 출발해 해당되는 시간 속에서 자신을 확증하는 틀을 갖는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자신의 존재는 반드시 전체 속에서 다른 존재와의 필연적 관계를 맺게 된다. 이것은 현존재가 주도적으로 한다는 것보다 존재 자체의 구조가 그러한 삶을 살 수밖에 없도록 한다는 뜻이다.
철학의 절대 명제인 ‘나는 생각한다’는 말은 생각이라는 구조가 필연적으로 ‘나’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는 말도 된다. ‘자아’(自我)라고 부르는 이 ‘나’란 존재는 언제나 이미 그리고 항상 시각화(時刻化)를 통해 구체적이면서도 특정한 형태를 띠고 자기 목적을 성취하는 존재다. 이러한 자아를 두고 하이데거는 ‘자기 자신 때문에 있는 존재’(Sein um sich selbst)라고 한다. 생각의 본질은 간단히 말해 ‘자기 존재의 필연성’을 자신의 내면에서 찾는다는 데 있다. 자아란 인간의 가치평가를 초월해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고유한 본래적 존재이며, 모든 존재의 정점(頂點)에는 자아라는 현존재가 위치한다.
하이데거의 이러한 설명 배후에는 서양 기독교 전통에 대한 전면적 거부가 들어있다. 순간순간 신의 뜻대로 살아가는 존재가 현존재가 아니라 현존재 자체가 이미 자신의 고유성을 확보하고 확정할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서양 기독교 교리를 하이데거는 이렇게 한 마디로 부정해 버린다. “그리스도교 교의론의 교의 내용은 전적으로 철학에 의해서 그리고 그때마다의 철학에 의해서 규정되어 있다.” (앞의 책, 238쪽)
인간은 ‘전체’를 창조하려는 사고를 한다. 자기 자신의 선악 판단을 통해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만드는 전능자가 되려고 한다.(창3:5, 22) 하이데거는 신의 죽음을 선언한 니체의 후손으로 화려하고도 난해한 허구적인 개념으로 현존재가 신임을 증명하려는 언어의 바벨탑을 쌓는 철학자이다. 그러나 바벨탑은 여호와 하나님의 진노에 진노를 쌓을 뿐이다.
사5:20~21 20 악을 선하다 하며 선을 악하다 하며 흑암으로 광명을 삼으며 광명으로 흑암을 삼으며 쓴 것으로 단 것을 삼으며 단 것으로 쓴 것을 삼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21 스스로 지혜롭다 하며 스스로 명철하다 하는 자들은 화 있을진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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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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