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레비나스의 절규-우선 타인(他人)부터 돌보라 !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서양 존재론의 대표적 명법(命法)이다. 레비나스는 이 전통을 따르는 철학자다. 그래서 인간의 본질을 내면으로부터 확립하려고 한다. 인간의 고유성은 바깥에 동떨어져 존재하지 않으며 내면에서 일순간 성립한다. ‘순간’(instant)의 어원적 의미는 ‘내면에(in) 선다(stare)’는 뜻이다. 레비나스에게 ‘자신의 내면에서 성립한다’는 말이나 ‘순간에 성립한다’는 말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된다. 다시 정리해 보면 주체는 순간 순간 자신을 정립하되 자신의 내면에서 그렇게 한다는 말이다.
지금 여기 이렇게 생각하는 주체는 ‘순간(instance)’ 그리고 자신의 내면에서 자기 자신을 세우고 있다(in-stare). 이 말은 시간의 지속성을 부정한다는 뜻이 된다. 레비나스가 말하는 자아는 과거가 있었거나 미래에 있을 대상과는 무관하다. 종교적 의미에서 현재를 배제하면서 미래에 다가올 존재를 기다리라고 하는 발상은 성립할 수 없다. 현재의 존재를 미래의 보상에 떠넘기려는 종교나 정치 집단은 자기 파괴를 강요하는 살인집단이다. 이렇게 레비나스는 시간성에 구애받지 않는 ‘순간’의 존재를 존재 이해의 실마리로 삼고자 한다.
그런데 레비나스가 말하는 순간의 존재(존재자)는 타인과 관계를 맺고 존재한다. 하지만 균등하게 존재하는 대상들은 없다. 그의 표현대로 옮기면 타인은 ‘비대칭’ 관계에 있는 존재다. 결코 동화(同化)시킬 수 없는 차이를 특성으로 존재한다. 균등화 내지 균일화할 수 없는 대상으로 파악해야 타인에 대한 진정한 평등이 성립한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겨놓고 남아도는 여력으로 거지에게 적선하듯 관계를 맺는 것은 이타적 행위가 될 수 없다. 자기 것을 자기 것으로 이미 챙겨놓는 행위에는 이미 타인들을 자기 욕구의 희생양으로 유린해 버린 범죄가 저질러졌다. 레비나스는 자기 중심적인 이러한 경향을 철학적 주제로 삼았던 당대의 대표적인 철학자가 독일의 하이데거라고 비판한다. 레비나스는 관계를 맺고 있는 타인에 대해 지배와 종속의 여지를 근본부터 배제하려는 의도를 가치고 타인은 함부로 종속시킬 수 없는 비대칭적 대상임을 강조한다.
이러한 타자의 고유한 차이성은 자신의 욕구를 위한 수단이 아니라 오히려 관계를 맺고 존재하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일깨워주는 자기 정립의 원천으로 보라고 한다. 함부로 접근해서 이리저리 조작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언제나 ‘절대적 타자’로서 존재하는 타인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타자의 절대성은 올바른 자기 정립을 위해 무조건 조작해야 하는 대상에서 무조건 의탁해야 하는 ‘구원자’의 이미지로 전환된다. 자기 정립의 욕구가 강할수록 관계 맺고 살아가야 한다는 의식이 더욱 선명해야 하고, 그것은 곧 타자에 대한 무한한 희생을 지불해야 한다는 요구로 이어진다.
자신의 외부에 존재하는 모든 대상들은 자기 존립을 위해서라도 우선 돌보아야 하며 공을 들여야 하는 대상이다. 자신의 정체가 무엇인지 제대로 규정하려면 타인에 대한 무한한 이타행(利他行)을 우선 실천해야 한다. 각자 비대칭적으로 존재함으로 반드시 도와야 하는 부분이 있다. 이처럼 주체의 본질은 타인에 대한 호혜적 행위 정도에 따라 확립될 수 있다.
레비나스에 따르면 인간이란 윤리적 관계의 절대적 가치를 알고 실천할 수 있는 존재다. 그 근거는 바로 타자의 절대적 필요성을 의식하기 때문이다. 타자는 어떤 수단으로도 지배할 수 없고 환원할 수도 없는 절대적 외재성으로 존재한다. 환원할 수 없는 타자를 레비나스는 소문자 타자(l'autre)와 구분해서 대문자 타자(l'Autre)로 나타낸다. 타자를 선대하고 환대할 수 없다면 주체는 자기 존재 의미를 찾을 수 없다.
레비나스의 설득력있는 윤리적 요청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그의 항거와 절규가 크면 클수록 그리스도의 절대적 희생과 무한한 자비와 은총 아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을 뿐이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고전 13장 1~3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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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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