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악(惡)한 존재’의 극복, 현대사상의 또 다른 허구
임마누엘 레비나스는 1939년 프랑스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이내 포로가 되었으며 리투아니아의 가족들은 학살 당한다. 그는 포로 수용소에서 존재에서 존재자로의 원고를 작성한다. 그 책의 처음을 자신과 마주 서 있는 세계에 대한 표현으로 시작한다. 그가 느낀 세계는 ‘조각난 세계’ 또는 ‘뒤죽박죽이 된 세계’, 한 마디로 세계 종말의 상황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레비나스는 ‘살아있음’의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고민한다.
우선 그는 존재란 언제나 익명적 상태임을 지적한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막연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경험한다. 서양 철학의 원천이라는 플라톤의 놀라움은 순간 순간 우리가 겪는 사건에 대한 경이로움이었다. 그 경이감은 세계가 자신의 내면에서 이해 가능한 대상으로 질서가 잡힌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레비나스에 따르면 이 놀라움의 사건에는 우선 낯섦을 경험해야한다는 점이 불가피하다. 낯섦의 경험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모든 경험을 필연적으로 지배한다. 지식에 대한 욕구와 만족에는 이러한 낯설음이 언제나 지배하고 있다. 하지만 세계에 관한 수 많은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존재 자체에 대한 대답일 수는 없다. 레비나스를 이러한 존재의 특성에 대해 ‘존재의 악’이라고 지칭한다.
존재는 순수한 지식의 대상이거나 선한 행위의 발단일 수 없다. 무엇이 진리인지도 무엇이 당위인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은 끊임없이 제기하라고 하지만 어떠한 명쾌한 것을 결코 주지 않는다. 레비나스는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을 추구해야 하지만 결코 그 답을 얻을 수 없는 인간의 비극에 관해 러시아의 유명한 이야기 하나를 소개한다.
단순하고 순진한 바보 장은 밭에서 일하는 아버지에게 점심을 드리기 위해 심부름을 가고 있다. 그런데 걸음을 옮길 때마다 점점 몰려오는 두려움이 있었다. 집을 나올 때부터 계속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자신에게 뭔가 요구하는 부탁을 하려는 듯 따라오는 물체가 있었다. 바보 장은 분명히 아버지가 드셔야 할 점심을 달라고 한다는 판단으로 그 손님에게 조금씩 조금씩 점심을 던져준다. 더 이상 따라오지 말길 바라면서 계속 던져주었다. 점심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존재에 대한 의미를 묻는 물음은 마치 예화와 같이 질질 끌고 다녀야 하는 부담스러움과 같다. 서양 존재론의 역사 나아가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은 바로 이러한 비극과 모순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고유한 특성을 사유의 위대함과 무한함이라고 내세우지만 위의 이야기를 통해 보면 허상인 존재의 망령을 떨쳐버리지 못한 운명의 종살이가 바로 존재 의미에 관한 탐구이다. 본래부터 존재는 어떠한 대답을 주지 않기로 되어있으며 잠시 멈추어 빵을 주는 순간에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내 움직이면 다시 무엇인가를 달라고 쫓아오는 망령과 같다.
레비나스는 이제까지 존재는 ‘악한 존재’였다고 한다. 다시 말해 어떤 존재 의미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 말은 물론 서양 철학자들이 존재를 잘못 이해해 왔다는 말이다. 그가 신의 죽음 이후의 또 다른 한 명의 현대 철학자인 이유는 이러한 악한 존재론의 역사를 ‘선한 존재론’으로 재정립하고자 시도하기 때문이다. 그러데 만약 신의 죽음이라는 절대적 가치의 붕괴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한 불가능한 기준을 고려한다면, 레비나스의 ‘선한 존재론’은 또 다시 서양의 자기 중심적 선악 판단으로 던져지는 것은 아닌가?
22 여호와 하나님께서 “보아라,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들 가운데 하나처럼 되었다. 이제 그가 그의 손을 내밀어 생명 나무 열매도 따먹고 영원히 살 수 있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다. 23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를 에덴 동산에서 내보내시고, 그의 근본이 된 그 땅을 경작하게 하셨다. (창 3:22-23/바른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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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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