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5-08-12 14:0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일흔:로마제국의 우상 숭배와 철학, 로마 가톨릭으로 둔갑 (1)


로마 가톨릭은 로마 제국의 정치와 종교의 연속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앞서 다루었듯이 로마 가톨릭의 수많은 종교 의식들이 로마 제국의 왕실과 민간에 이미 수백 년 동안 견고한 문화로 자리 잡았던 의식들이다. 여기에 기독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이후 이방 종교의 의식은 그대로 이어지면서 명칭만 기독교 관련 개념으로 바뀌었다. 가령, 황제의 ‘대제사장(Pontifex Maximus)’ 칭호는 교황의 공식 칭호로 계승되었으며, 황제의 신적 권위를 보여주던 황제 행렬 및 궁정 의전은 교황 행렬과 교황을 호위하기 위해 예복·관모를 착용하는 의식으로 탈바꿈했다. 사투르날리아(Saturnalia)와 태양신 축일(12월 25일)은 ‘예수 탄생 축일’(크리스마스)로 자리를 잡았다. 이교 신전에 드리던 제단·향·촛불은 성당의 제단·향·촛불로 자리를 옮겼다. 유명 인물 추모제는 성인 축일과 로마 가톨릭이 선별한 순교자 기념일로 바뀐다. 이방신 숭배를 위한 성상·신상 행렬은 마리아상·성인 유골 행렬로 대체했으며, 로마 달력의 축일제는 성인 축일·교회력으로, 신상 앞에 향을 피우던 향제(香祭)는 미사의 향로 사용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앞서 말한 사투르날리아와 태양신 축일은 로마의 겨울 연말 축제였다. 사투르누스(Saturn)는 로마의 농경신으로 로마인들은 12월 17일부터 12월 23일까지 약 1주일 동안 대축제를 벌인다. 농사의 신을 찬양하는 풍요·자유·평등의 축제였다. 이 기간에는 주인과 노예가 그 역할을 바꾸는 풍습도 있었다. 자유와 평등의 체험으로 노예가 주인처럼 대우받고, 주인은 시중을 들기도 했다. 그리고 촛불이나 인형을 가지고 선물을 교환하는가 하면 초록 식물과 화환으로 온 집안을 장식했다. 현재 크리스마스이브의 선물교환이나 크리스마스트리 장식 풍습은 바로 이러한 로마의 농경신 숭배 축제의 잔재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이 사투르날리아 축제에서는 연일 이어지는 큰 연회와 노래와 가무, 도박도 허용하는 그야말로 연말 대축제였다. 로마인들은 이러한 연말 축제를 즐기면서 농경신 사투르누스가 다스렸다고 전해지는 풍요와 자유의 ‘황금시대’를 동경했다. 이렇게 보면 현재 서양에서 유래한 성탄절 문화는 기독교의 본질이나 성경 진리와는 거리가 먼 이방신 숭배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의식해야 한다.

그런데 문화적 관습이나 풍습뿐 아니라 헬레니즘의 철학 사상 또한 마치 기독교 진리처럼 둔갑했다. 성경 진리에 근거를 둔 기독교 신앙이 아니라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기독교의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이 허다하다는 말이다. 로마 황제 숭배의 갖가지 이교도 풍습들이 마치 기독교 전통처럼 위장하면서 로마 가톨릭의 교황 체제를 떠받들고 있던 6세기 초, 그리스 철학 안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신학적으로 화해시켰던 유명한 철학자가 있다. 보에티우스다. 로마 귀족 출신 학자 보에티우스(Anicius Manlius Severinus Boethius, 약 480-524)는 기독교인이었으며 정통(니케아) 신앙을 지지한 인물이다. 그는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던 동고트 왕국의 재상(宰相)이기도 했다. 당시 국왕은 예수의 신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의 신봉자였던 테오도릭 대왕이다. 보에티우스는 로마 가톨릭의 귀족 세력과 함께 정통파 기독교의 이해를 대변하고자 했으며 나아가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하는 동고트족과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동로마 제국의 관계를 개선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523년 무렵 반란 혐의자의 덫에 걸린다. ‘동로마 황제와 내통하며 (아리우스파를 신봉하는) 동고트족의 왕(테오도릭)을 전복하려 한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처형된다. 테오도릭 황제는 당시 로마 귀족들이 동로마(유스티누아누스 황제)와 손을 잡고 자신을 죽이려 한다고 보았으므로 보에티우스는, 사실 여부를 떠나, 살해 음모의 덫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보에티우스는 그리스어에 유창했으며 동시에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에도 정통했다. 그는 두 철학자를 로마 제국의 언어 라틴어로 번역하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그는 아리우스파 통치자 테오도릭 수하에 있었지만 니케아 신조(당시 정통파의 신조)와 로마 전통 철학을 결합하고자 했다. 그러한 시도의 대표작이 그의 옥중서 『철학의 위안에 대하여(De Consolatione Philosophiae)』다. ‘철학의 위안에 대하여’에서 보에티우스는 고대 철학 특히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스토아 철학을 정통 기독교 신앙과 접목시킨다. 매우 흥미로운 점은 직접적인 성경 인용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산문과 운문이 교차하는 대화체로 이루어진 내용으로 절망에 빠진 ‘보에티우스’와 그를 위로하는 부인인 ‘철학(Philosophia)’이 대화를 하는 방식이다. 주요 내용들이다. 권력과 부 그리고 명예는 덧없으며 ‘행운(Fortuna)’의 수레바퀴는 윤회한다. 참된 행복이란 오직 선 자체인 하나님(최고선, Summum Bonum)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나님의 섭리(Providentia)는 궁극적으로 선하며, 세상 사건들은 그러한 섭리의 질서 속에 ‘운명(Fatum)’으로 포함된다. 하나님의 전지(全知)하심과 인간의 자유의지는 양립한다.

보에티우스는 섭리와 운명에 대해 다음과 같은 판단을 내린다. 섭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으로서 궁극적 설계도라면 운명은 설계도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전개되는 과정이다. 섭리가 초월적·영원적 차원이며 운명은 시간·공간 안에서 인식가능한 인과적 질서다. 섭리가 하나님의 최고선이 궁극적 목적이라면 운명은 피조 세계의 사건·원인·결과에 해당한다. 그래서 섭리는 불변이지만 운명은 반드시 인과법칙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 이렇듯 섭리를 건축가의 머릿속에 든 완전한 설계도라면 운명은 설계도에 따라 짓는 건축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령 테오도릭 왕이 반란군에 의해 목숨을 잃는 것은 운명(fatum)이지만 이 사건은 다른 모든 사건과 함께 연관되어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섭리)을 이룬다. 그는 섭리와 운명을 구분함으로써 하나님의 궁극적 선하심과 세상의 변화무상 사건들을 철학적 논리로 연관 짓고자 한다. 보에티우스의 이러한 섭리와 운명의 관계 설명을 통해 당시 지배적 사상이었던 스토아 철학의 숙명론을 극복하고 목적론적(teleological) 질서를 강조하고자 한다.

보에티우스는 하나님의 본성에서 나오는 영원한 궁극적 계획인 ‘섭리’와 그 섭리가 시간·공간 안에서 펼쳐지는 방식인 ‘운명’의 관계를 통해 인간의 자유의지(Liberum Arbitrium)를 옹호한다. 섭리의 지배를 받는 운명은 인간이 경험하는 사건을 만드는 원인·결과라는 사슬이다. 이 사슬의 운명 속에서도 인간이 선택할 수 있는 도덕적 능력이 존재하는데 이를 ‘자유의지’라고 한다. 하나님은 영원 속에서 인간의 선택을 ‘미리’ 알고 있지만, 그 예지(豫知)가 인간 자유를 파괴하지 않는다고 본다. 인과법칙이 지배하는 운명이 전개되면서 그 운명 안에서 인간이 실제로 자기 기준으로 선택하는 활동이 일어나는데 이를 자유의지라고 한다.


<278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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