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16세기 서남아시아의 로마 가톨릭과 조선
17 유다의 땅은 애굽의 두려움이 되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애굽에 대하여 정하신 모략을 인함이라 (……) 19 그 날에 애굽 땅 중앙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이 있겠고 그 변경에는 여호와를 위하여 기둥이 있을 것이요 (……) 21 여호와께서 자기를 애굽에 알게 하시리니 그 날에 애굽인이 여호와를 알고 제물과 예물을 그에게 드리고 경배할 것이요 여호와께 서원하고 그대로 행하리라 22 여호와께서 애굽을 치실 것이라도 치시고는 고치실 것인고로 그들이 여호와께로 돌아올 것이라 (……) 24 그 날에 이스라엘이 애굽과 앗수르로 더불어 셋이 세계 중에 복이 되리니 25 이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하실 것임이니라(사 19:17,19,21-22,24-25)
16세기 유럽은 종교개혁으로 인한 ‘성경권위’가 확산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회적 상황은 한마디로 혼란함 그 자체였다.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진영 사이에는 종교전쟁이 잇따랐다. 로마 가톨릭 교황 체제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민족주의 운동의 불이 붙고 있었다. 이것은 연이은 국가 간 전쟁으로 이어졌다. 동로마제국의 멸망으로 이슬람 세력은 유럽으로 남진하고 있었으며, 야만인 취급 받던 북유럽에는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고 있었다. 슬픈 열대 남아메리카에서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의 열강들이 선교라는 명목으로 원주민을 약탈하고 있었으며, 유럽인들이 감염시킨 천연두는 두 세대 지나며 원주민 90%를 죽였다.
앞의 본문은 남유다가 바벨론제국에 의해 멸망당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이 이사야 선지자에게 전해지는 내용 중 일부다. 남유다는 바벨론제국에 의해 망하지만 70년 포로 이후 페르시아제국 초대왕 고레스에 의해 약속대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다. 그런데 앞의 본문은 회복 시기에 있을 이방인 구원에 대한 놀라운 약속이 나온다. 애굽을 포함해 주변의 이방 국가도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한다는 내용이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 일을 주관하시겠다고 한다. 21절에 보면 여호와는 자기 이름을 애굽에 알게 하고 애굽인들이 여호와께 제물과 예물을 드리며 경배하고 맹세한다고 한다. 이 여파는 다른 나라에도 미친다. 24절에 보면 그날에 이스라엘과 애굽과 앗수르가 함께 여호와의 축복받은 나라가 된다.
“25 만군의 여호와께서 복을 주어 가라사대 나의 백성 애굽이여, 나의 손으로 지은 앗수르여, 나의 산업 이스라엘이여, 복이 있을지어다.”
우리는 지금 2천7백여 년 전에 예언된 이러한 하나님의 위대한 이방인에 대한 작정섭리를 우리 한국 교회와 연결짓고자 한다. 이하에서는 남미와는 다른 방법으로 유럽의 종교개혁으로 드러난 성경권위, 하늘의 소피아(Sophia, 지혜)를 여호와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극동 대한민국에 전파할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잠시 살피려는 것이다.
16세기 남미가 로마 가톨릭에 의해 초토화되고 있을 무렵, 아시아에도 유럽은 로마 가톨릭 포교를 확장하고 있었다. 남미를 약탈과 질병으로 초토화시켰던 당시 스페인 왕은 종교개혁 세력을 억제하며 로마 가톨릭에 충성 맹세했던 필립 2세(Felipe II, 1527-1598)였다. 영국과 네덜란드에 패배하기까지 필립 2세는 그야말로 유럽의 최고 지배권을 장악했던 인물이다. 한때 이탈리아 밀라노와 나폴리 그리고 시칠리아까지, 잉글랜드와 네덜란드까지 지배하며 스페인 최고 번영 시대를 이끈다.
로마 가톨릭의 수호자로 자처했던 그는 아시아로도 세력을 확장했다. 그의 이름을 딴 아시아 식민지가 바로 ‘필리핀(Philippines)’이다. 그리고 인도에는 포르투갈인들이 포교를 확장했다. 이들은 로마 교황청이 인정하지 않는 다른 부류의 포교자들(단성론자들-그리스도의 두 본성인 신성과 인성을 부정하는 자들)에게도 잔혹했다. 이베리아반도에서 하던 대로 도서관을 비롯한 시설물을 방화하고 화형까지 일삼았다. 인도 내에서는 카스트 제도를 붕괴시키기도 했다. 힌두교를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 포교력은 스리랑카까지 영역을 넓혔다. 17세기 스페인을 물리친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가 스리랑카를 종교적 이유로 탄압했을 때도 가톨릭 신자들은 네덜란드의 개종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매우 흥미로운 사실은 네덜란드의 통치가 끝났을 때 스리랑카에서는 네덜란드 개혁파 교회도 함께 붕괴했다는 점이다.1)
남아메리카의 약탈을 본 로마 가톨릭 수사들은 아시아에서는 선교 전략을 바꾼다. 원주민들의 문화와 언어를 유지하면서 가톨릭을 혼합시켰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탈리아 출신 예수회 소속 수사인 로베르토 데 노빌리(Robert de Nobili, 1577-1656)였다.(544) 인도뿐 아니라 중국 포교의 길까지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 그는 포교를 위해 힌두교 귀족처럼 행세했다. 원주민들이 조롱하건 말건 이러한 모습은 인도 하층민들에게 파고들어 종교 지도자의 지위를 확보한다. 같은 예수회 수사들의 억압을 견디면서도 그의 포교는 토착화에 성공한다. 두 세기가 흘러 무슬림의 혹독한 박해 속에서도 그가 전한 로마 가톨릭은 그 명맥을 잇는다.
이 방식의 포교는 특히 중국에 와서 매우 익숙한 전략이 되었다. 중국 최초 선교사 마테오 리치(Mateo Ricci, 1552-1610)가 이 전략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처음에는 불교 승려 복장이었으며 유교 전통에서 불교가 영향력이 없는 줄 알고 유학자 복장을 하고 수염도 길렀다. 중국은 남미처럼 약탈할 수 없던 강국이었으므로 포교 전략을 바꿨다. 중국은 예수회가 전해주는 수학이나 천문학, 지리학, 달력 등에 흥미를 보였지만 그것이 인도와 같은 대량의 포교로 직접 연결되지는 않았다. 17세기 한때 25만 명의 신도들이 있었지만 18세기 결국 외국인 선교사가 모두 추방당하는 일로 남미와 인도 같은 선교사들의 직접적 포교는 확장할 수 없었다. 그리고 바로 이 당시 중국에 전해진 가톨릭이 조선에도 들어오게 된다. 하나님의 이름이 이렇게 로마 가톨릭에 의해 소개되었지만, 그 뿌리를 내리게 하는 하나님의 섭리는 유럽과 영미의 개혁파 신학의 교회 역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200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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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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