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24-08-13 09:5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예순둘: 아우구스티누스, 서방교회 권력의 토대를 놓다


서방교회라고 말할 때 동시에 연상하는 인물이 있다. 바로 아우구스티누스(Sanctus Aurelius Augustinus Hipponensis, 354-430)다. 그는 서로마제국의 성장과 번성은 물론 몰락을 함께 경험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배경 설명은 서로마제국이 몰락하면서 서구 유럽의 권력을 로마 가톨릭이 장악해 가는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 아우구스티누스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의 지적 출발은 로마 철학과 라틴 문학 그리고 당시 라틴문화의 중심이며 정치적 출세의 보증수표와 같았던 수사학이었다. 이는 향후 아우구스티누스의 지적 여정에 결정적 토대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지적 능력을 배양하는 동안 아우구스티누스의 종교적 고민도 더욱 깊어갔다. 그 문제의 본질은 세상의 악과 인간의 고통에 대한 문제였다. 그는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세상을 선과 악의 영원한 이원론적 투쟁으로 보는 영지주의 종교인 마니교에 9년 동안 심취했다. 하지만 그는 악과 고통의 근본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는 라틴문학에 비해 성경은 조잡한 문서 정도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는 성경 말씀의 권위에 대해 신비한 체험을 하면서 기독교로 전향한다. 무작위로 폈던 성경은 로마서 13장 13-14절[13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14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이라고 한다. 이러한 성경 본문 체험을 볼 때 악과 고통의 문제를 오랫동안 고민하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무엇보다 ‘죄’ 문제는 향후 신학 정립의 중요한 주제가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짐작할 수 있으며,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의 ‘원죄론’은 서방 신학의 토대가 됨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죄에 대한 탈출구를 찾고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처음에는 독신주의자들을 모아 수도원 공동체를 만들고자 시도했다. 하지만 교회 정세의 불안으로 이 운동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당시 카르타고 다음으로 가장 중요한 항구였던 히포 레기우스(현재 알제리의 아나바)에 정착하고 그곳에서 391년부터 430년 죽을 때까지 교회 감독으로 살게 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감독으로 가장 먼저 직면한 문제는 도나투스파(Donatism)와 벌인 논쟁이었다. 도나투스파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대박해(Diocletianic Persecution) 기간 동안 자신들이 수호한 흠 없는 모습이 구원의 척도임을 주장했다. 기독교인들에게 가해진 극심한 이 박해는 303년부터 311년까지 약 8년 동안 지속했으며 기독교 역사상 가장 잔인하고 조직적인 박해 중 하나로 손꼽힌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303년 기독교인들을 탄압하기 위한 일련의 칙령을 발표한다. 이 칙령에 따라 기독교 교회는 파괴되었고 성경은 불태워졌으며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고문과 처형을 당했다. 이 박해는 제국 전역에서 일어났으며 특히 교회 지도자들과 성직자들이 주요 표적이 되었다. 이 박해를 견뎠던 자들 가운데 북아프리카에서 신앙을 배신한 성직자들이 집행하는 성례는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분파가 등장했는데, 이들이 도나투스파였다. 이들은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 당시 신앙을 포기했던 성직자들의 교회 복귀를 반대했다. 이들은 정결한 교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박해 동안 타협하지 않은 순수한 성직자들만 성례를 집행할 자격이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도나투스파의 주장은 교회 내부에 큰 분열을 일으켰으며 교회와 국가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결국 도나투스파는 교회의 공식 입장에 반대하는 이단으로 간주되었다.  교회 내에서 성직자의 순결 문제를 표면화시킨 이 문제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교회란 ‘순수한 공동체 모임’이 아니라 ‘하나의 거룩한 가톨릭교회’가 교회의 본질이며 이는 순수하다기보다 ‘순수하기 위해 노력하고 갈망하는 교회’라는 뜻이라고 정의했다.(469 참조) 성례의 유효성에 대해 신앙을 배신한 성직자들이 집행하는 성례가 유효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도나투스파의 주장에 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성례의 유효성은 성직자의 도덕적 상태에 달려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성례의 효력은 오직 하나님께 달려 있으며 성직자의 개인적 불완전함이 성례의 효과를 무효화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 인정받은 성직자가 집행한 모든 성례는 유효하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의 주장이 교회의 일치를 위협한다고 보았다. 성직자의 완전한 정결을 요구하는 도나투스파의 입장은 현실적이지 않다고 보았으며, 교회란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로 구성된 공동체로서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사랑과 용서이므로 박해 중 신앙을 포기했던 사람들에게도 용서와 회개의 기회를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도나투스파의 엄격한 정결 요구가 오히려 기독교의 기본 정신에 어긋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도나투스파의 사상에 대해 신학적 주장으로 체계적으로 반박했으며 결국 도나투스파를 이단으로 규정했다. 로마제국의 권력에 힘을 얻은 아우구스티누스의 도나투스파에 대한 정죄는 향후 서방교회의 통일성이 진리가 아니라 교회의 권력에 의해 작동하게 된다는 주요한 신호탄이 되었다.

교회역사가 맥클로흐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이렇게 정리하고 있다. “이것은 기독교 정부가 이단과 분열을 처벌함으로 교회를 지지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이것으로 인한 내키지 않는 복종도 살아있는 신앙의 출발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은 이후 수 세기 동안 기독교 체제의 많은 관심을 끈 아우구스티누스의 가르침의 한 측면이기도 했다.”(470)


<262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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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성경신학학술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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