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신학

 
작성일 : 14-06-29 20:23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기독인의 동양사상 맛보기

동역자와 교육실천


동역자는 ‘같은 역할을 맡은 사람’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에서는 ‘함께 일하는 사람’(συ  νε      ργ, 쉰에르고스)이라 하고, 영어에서는 ‘역할에 참여하는 자’(take-parter)라고 합니다. 사실 동역자는 바울 사도가 즐겨 사용했던 용어라 할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자신의 제자인 디모데도 동역자요, 선교문제로 서로 다투기도 했던 바나바도 동역자요, 여인도 동역자요, 노예 출신 오네시모도 동역자이였습니다. 한자에서 ‘역’(役)은 육체적인 노동의 일 또는 노역과 같은 일을 의미했습니다. 옛날에는 농사를 짓는 일을 제외하면 노역의 일 외에 할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역은 대부분 강제로 해야 하는 일을 의미했던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동역자라는 말의 근본 의미는 ‘같은 일에 명령을 받아 수고하는 일꾼’이 되겠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의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 같이 고생하면서 기운이 다 떨어진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을 아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상황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마 9:37, 38)라고 기도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일꾼은 ‘ργάτ, 에르가태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열심을 다하여 일하는 노동자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감당하셔야했던 복음사역의 현장을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는 노동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의 일꾼들은 열 두 사람이 중심이었습니다. 그들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모든 배움은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며 그분의 명령에 순종하는지를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지 못했고, 의심했고, 모른다고 부인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그들을 자신이 부리는 일꾼이 아니라 제자로 친구로 자녀로 여기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발까지 씻어주며 그들을 품에 안았습니다.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하나가 되고, 서로 섬겨야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일꾼 대하는 방식이 바울에게는 동역자로 이해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일꾼이자 하나님의 일에만 온 마음과 몸을 다 바쳤습니다. 바울도 자신을 하나님께 바치는 일꾼이었습니다. 그는 복음전파를 위해 일생을 마쳤습니다. 
 
오늘날 우리 믿는 자들은 예수님과 바울 사도의 동역자입니다. 그리고 동역자에게는 또 다른 동역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이 동역자는 우선적으로 가족이나 친척과 같이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외에 친구 직장동료와 같은 사회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동역자가 됩니다. 가족이 동역자라는 말은 부모와 자녀가 서로를 위해서 일해 주는 그래서 서로 제자가 되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에서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서로를 섬겨야 하고, 학교에서는 선생님과 학생이 서로를 위해 일하면서 섬겨야 합니다. 동역자로서의 살아간다는 것은 예수님이 모든 인생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희생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선생님이 제자들을 위해, 목사님이 성도들을 위해, 건강한 사람이 약한 사람을 위해,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위해서 말입니다. 물론 그 반대의 역할도 반드시 실천되어야 합니다. 동역자로서의 또 다른 삶은 솔선수범하는 생활입니다. 솔선수범(率先垂範)은 앞선 사람의 바람직한 행동이나 사상을 나 자신이 먼저 따르고, 그 후에 다른 사람들에게 모범된 행동과 사상을 내려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 우리가 먼저 앞서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 뒤로는 그러한 삶의 향기를 남기는 것입니다. 이 일은 겨자씨만한 믿음이 있으면 할 수 있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으로라도 온가족이 서로 믿고 사랑하고 섬겨야 합니다.
나아가서 동역자들이 서로 믿어주고 본받고 믿게 하고 본받게 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외에도 동역자는 바울처럼 죄인 중에 우두머리(딤전1:15)라고 고백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의 동역자인 우리가 같은 동역자인 우리의 자녀나 제자들에게 심하게 말했다면 그것은 바울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봅니다.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멸시하고 모욕했다면 그것 역시 영적으로 살인을 한 행위나 마찬가지입니다. 삶의 현장에서 나 자신이 살기위해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우두머리에 해당하는 죄인들입니다. 

동역자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교육 실천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공자(孔子)는 “학이시습지불역열호”(學而時習之不亦說乎, 배우고 때에 따라 (그것을) 익히면 또한 즐겁지 않겠습니까? 『공자(孔子)』, 「學而」)라고 해서 먼저 배울 것을 강조했습니다. 배우고 익히면 나중에 즐거움이 생길 것으로 본 것입니다. 학문이라는 말 역시 “배우고(學, 학) 묻는다(問, 문)”는 의미로서 먼저 배울 것을 강조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동양의 교육은 먼저 배울 것을 중시했다고 하겠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마11:29). 동역자인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먼저 예수님에게서 온유와 겸손을 배워서 쉼을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배움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무엇일까요. 주일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생각해 봅시다.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 예배하러 간다면 그 자체가 배움이요 쉼이 됩니다. 예배 중에 졸았다 하더라도 그것조차도 육체적으로 쉼을 얻은 것입니다. 예배 중에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돌보심을 더욱 감사하게 되었다면 육체적 쉼은 물론 정신적 쉼이자 배움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배움은 다른 한편으로는 가르침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본받아서 실천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완전하게 하나님께 배운 것입니다. 그 배움이 제자들에게는 가르침이 된 것입니다. 분명히 배움은 본받음입니다. 그런데 그 본받음이 곧 가르침이 됩니다. 본받음이 없는 가르침은 위선이요 거짓입니다. 교육이란 먼저 본받고 그 본받음의 배움으로 가르쳐서 자라게 하고 쉼을 얻게 하는 인간의 생활실천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맺겠습니다. 오늘날 이 땅을 살아가고 있는 대한민국의 신앙인들은 가족은 물론 우리 민족에 대해서와 세계인에 대해서도 동일하게 그리스도의 동역자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들을 믿어주고 사랑하여 복음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솔선수범의 삶을 실천하는 일꾼이어야 하겠습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핍박하는 죄를 범하기에 자신을 죄인으로 고백하는 일꾼이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겸손과 온유를 배워서 쉼을 얻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한편으로는 배우고 한편으로는 가르치는 삶을 실천해야 하겠습니다. 이 삶을 통해 유구한 역사에 빛나는 대한민국과 세상을 평안한 쉼이 있는 곳으로 만들어갑시다.


※ 본 글은 필자가 다음 호(93호)부터 연재할 ‘기독인의 동양사상 맛보기’로 신문을 통해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 힘쓰는 동역자로 함께 삶으로 실천할 것임에 대한 입장을 표현한 글이다.

글쓴이 소개

약력
총신대학교 기독교교육학과
고려대학교 사회학과(문학석사)
중앙대학교 교육학과(교육학박사)
전 중앙대, 총신대 겸임교수
전 두레학교 교장
현 백석대 외래교수

저서
그리스도인의 삶에 새겨지는 로고스
기독교사의 세상바로보기-불교, 유교
원형이정의 세계와 교육(주역의 교육관 연구)
예비교사를 위한 논리와 논술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박사(교육학), 백석대 외래교수

‘신 죽음 시대’의 종교인: ‘지독교’회사의 광고주!
초끈과 고차원 공간 그리고 기독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