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신정론의 담론(談論) 9
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고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갈라디아서 3장 15절-18절 개역성경)
예전부터 기독교 예정론을 연구한 학자들은 인간의 타락을 기준으로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뉘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이 타락하기 이전에 선택과 유기를 미리 결정하셨다는 ‘전택설(前擇說)’이 있다. 둘째,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선택과 유기를 결정하셨다는 ‘후택설(後擇說)’이 있다. 이들이 각각 주장하는 이 두 신학의 논리 기준에도 인간 타락이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죄와 그것을 속량해 주는 은혜가 그 중심에 핵심적인 개념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만큼 죄와 은혜의 본질적인 연구는 기독교 신학을 정립하는 데 있어 미래에 중대한 신학 향방의 엄청난 파장을 일으킬 수 있는 중요한 개념이자 이정표이었기 때문이다. 과거 신학자들은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신학을 세우는 데 있어서 오로지 성경적이어야 하는데 그 당시 시대적인 상황이 그렇지 못했다. 그러한 결과물들이 오늘날 기독교 교리 갈등의 온상인 수많은 교파를 생산해 놓았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 과정의 흐름 속에서 갈등과 아픔조차도 이 역시 하나님의 계시 섭리 중 하나이다.
죄의 근원에 대해 이미 살펴본 바가 있다. 죄는 절대 주권자이신 하나님께서 만사만물을 통치하시는 계시섭리의 한 방편인데, 하나님께서 죄를 허용했다는 전제로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죄로 인해 좌우된다는 후택설은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대부분의 성경교사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은혜에 대해 간헐적으로 언급하지만 그렇게 성경적으로 상세하게 가르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선호하지 않고 있는 기독교 예정론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정론을 인정한다면 그동안 쌓아왔던 신학과 기득권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는 죄와 은혜의 관계성 중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죄와 전혀 상관없는 것을 성경 말씀에서 근거를 찾아 증명하며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죄와 관계있는 은혜에 대해 탐구해 보려고 한다. 먼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백성들에게 명하신 율법 아래서의 은혜이다. 이러한 은혜를 성경 구약 역사서에 나타난 사건 중 일부 나열해 보려고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이후 광야에 머물고 있었던 시기에 모세가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고 있을 때 백성들이 금 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을 섬기는 죄를 범했다. 그리고 바란 광야에서 가나안 땅을 정탐한 후 부정적인 보고에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다시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했던 일도 있었다. 이러한 백성들의 행동은 율법을 따르지 않는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베풀었다. 또한, 사사시대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진입했을 때 여호수아가 죽은 후 사사가 없는 시기에 우상을 섬기는 등 온갖 범죄와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했다. 이로 인해 많은 시련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때마다 사사를 보내주셔서 회복과 평강을 누리는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그리고 통일왕국시대에는 다윗왕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것과 솔로몬왕이 이방 여인을 왕비로 삼아 우상을 섬기게 한 행위는 율법을 위반하는 범죄임에도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베푸셨다. 이 밖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바벨론 포로 전후 시대 등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하여 은혜를 베풀어 주셨다. 수많은 범죄에도 이스라엘을 아주 멸하지 않으셨다. 이러한 은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하신 원형적인 은혜언약에 근거하여 이스라엘 열조에게 세우신 언약대로 이루어주신 계시섭리이다.
이러한 것을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 관점에서는 이렇게 정리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죄보다 우선한다.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이 죄를 범한 후에 용서해 주시는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베풀어 주신 은혜를 깨닫게 하시려고 율법을 범한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심은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한 계시섭리이다”라고 요약하고 있다. 또한, 죄와 은혜의 관계를 사도 바울은 위의 본문 내용 갈라디아서 3장 15절에서 18절까지 기록된 말씀에서 더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다. 곧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유업으로 주신 은혜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모세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으로는 없애거나 헛되이 못하기 때문에 반드시 성취해 주신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앞서 모세시대의 율법 아래서 수많은 죄로 죽음을 면치 못할 백성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는 죄와 관계있는 은혜이다.
두 번째는 대속을 통한 은혜가 있다. 인간 타락 이후를 중심으로 하는 구속사 신학에 있어서도 근원이 되는 대속(代贖)을 통한 은혜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 8장 4절에 언급하였듯이 율법의 요구 즉, 죄로 인한 대가로 형벌을 받아 반드시 죽어야 할 자기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대신 속량해 주시는 은혜를 말한다. 여기서 대속은 일반신학자들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시대의 율법에 따른 행위의 조건으로 명하신 말씀을 언약이라고 말하는 행위언약과 관계가 깊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 열조에게 은혜언약을 먼저 세우시고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조건으로 행위언약을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로 상반되어 보일 수도 있는 두 언약은 모두 세워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두 언약 모두 존재해야 할 이유가 없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은 반드시 성취되어야 했기 때문에 둘 중 어느 것도 폐할 수는 없다.
대속과 은혜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대속은 은혜가 전제되지 않으면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속은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구속사 신학에 있어 핵심적인 요소로도 작용한다. 그러나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로고스(λoγοc) 안에 포함되어 있는 대속은 하나님 은혜의 본질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계시섭리의 한 방편이다.
그리고 모세시대의 율법의 기능은 정죄와 사죄의 규례, 백성들 사이에 발생하는 상충에 대한 처벌과 보상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 율례가 있다. 규례는 대부분 계명에 의해 정죄된 것을 대신하여 용서해 주는 제사법이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율법의 쓰임새를 히브리서 10장 1절에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바 같은 제사로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러한 속죄제사는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에 불과하기 때문에 인간을 온전케 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대속은 창세전에 택한 백성들에게 주신 원형적 은혜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로서의 계시적 은혜이다. 다시 정리하면 구약의 율법적인 속죄 제사 규례는 장차 오셔서 제사장 직임으로 성취해 주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의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이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도 죄를 대속해 주시는 은혜이므로 죄와 관계있는 은혜이다.
은혜언약은 무조건적으로 이루어주시는 것이고, 행위언약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은혜를 이루어 주신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은혜언약이나 행위언약은 모두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속에 근원적이고 본질적인 은혜를 계시하는 방법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 두 언약은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에 기초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세 번째는 선한 생활의 은혜이다. 대속함을 받은 백성이 죄악이 가득한 타락된 세상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선하게 살아가도록 성령을 통하여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하여 성경을 근거로 알아보려고 한다. 인간은 아담 선악과 사건 이후로 죄성이 가득한 타락한 이성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본성을 지니고 죄 가운데 잉태되고 태어난다. 그리고 죄의 권세 아래 종노릇 하며 살고 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절에서 3절, 4장 17절에서 19절까지 본문에서 인간이 죄의 종노릇 하는 타락된 모습을 잘 표현해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언급한 내용과 같이 인간은 예수를 믿고 중생하여 성령의 인도를 받기 전에는 죄의 노예로 사로잡혀 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작정하시고 예정에 따라 창세전에 택한 백성들을 때가 차매 부르셔서 중생, 회개, 칭의, 양자로 삼으심으로 말미암아 선하게 살 수 있도록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의 선한 행위들은 자기 공로의 행위가 아닌 성령의 능력으로 맺게 하신 성령의 열매로서의 행위이다. 그런데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성령의 열매를 인간의 노력에 의한 공로로 맺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2장 8절에서 9절 본문에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공로가 아닌 은혜의 선물로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을 인간들이 자랑치 못하게 하시려는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다.
따라서 성도가 많은 선행을 하여 상급으로 면류관을 받았다 하더라도 결국 그 면류관 상급 자체가 성령의 열매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마땅히 그 영광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다. 또한, 성도가 신앙생활 가운데 범죄를 하는 것 역시 그 범죄 행위는 성도 스스로의 의지결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신정론의 담론 주제 처음 시점부터 강조한 바가 있다. 그러므로 성도가 비록 성령으로 말미암아 중생해서 신앙생활을 한다 하더라도 육체에 속한 불완전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 안에 남아 있는 육체의 소욕인 죄가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사단의 조종을 받아 성도로 하여금 여전히 범죄하며 살아가도록 하고 있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로마서 7장 15절에서 20절 본문에 잘 알려 주고 계신다. 곧 성도의 범죄가 성도의 독자적인 의지결정에 의한 행동이 아니라 성도 안에 거하는 죄가 행동하게 한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범죄행위 역시 하나님의 지배 아래 있는 사단에 의해 행하게 된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인간의 선한 행위나 악한 행위 모두가 인간 스스로 독자적인 행동에 의해 결정할 수 없음을 알려 주고 있다.
사도 바울이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한 골로새서 1장 9절에서 12절 본문에서 ‘채우게 하시고’, ‘기쁘시게 하시고’, ‘맺게 하시며’, ‘이르게 하시고’, ‘합당하게 하신’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고 대상은 성도들이기 때문에 이러한 동사들은 성도들의 노력이나 열심으로는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도들로 하여금 선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게 해 주신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즉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할 수 있도록 성도들에게 능력을 주셔야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곧 죄와 관련하여 입증되는 선한 생활로서의 은혜인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박용기,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진리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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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
변증론의 토대 3원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