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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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3-25 23:0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신정론의 담론(談論) 1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라디아서 2장 21절 개역성경)

지금까지는 죄의 기원, 죄와 율법의 관계, 죄와 은혜의 관계를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총서와 몇몇 신학자들의 견해를 요약하며, 나름대로 미력한 신학의 지식으로 깨달은 바를 서술해 보았다. 이번 호부터는 율법, 죄, 은혜라는 이 용어들이 상호 유기적으로 작용하는 관계를 통해 ‘율법의 용도’, ‘죄의 필요성’, ‘은혜의 목적’이라는 주제로 세 번으로 나누어 탐구하면서 ‘신정론의 담론’ 주제를 갈무리하려고 한다. 먼저 ‘율법의 용도’가 어떠한 것인지 알아보려고 한다.


율법의 용도는 죄로 심히 죄 되게 한다

율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세시대에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율법과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주신 금과법, 즉 에덴의 율법도 포함된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인간 내면에 구체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죄로 말미암아 확실하게 죄인 되게 하셔서 죄를 깨닫지 못하는 인간들에게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용도로 사용하셨다. 이러한 것을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 로마서 3장 20절에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 죄를 깨달음이니라”고 명확하게 증거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용도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해 스스로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작정 가운데 택한 백성들에게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은혜에 바탕을 두고, 죄를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인간들이 정죄기능 역할을 하는 율법을 준수하지 않았기 때문에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율법을 어김으로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대부분의 전통적인 개혁파 신학자는 율법의 쓰임새를 성도들의 생활규범 측면으로 많이 강조하고 있다. 또한, 성경교사들도 율법 중에 전부가 아닌 일부를 골라서 지켜야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율법의 올무에 가두고 있는 경우도 볼 수 있다. 성경을 살펴보면 율법을 지키라는 구절은 다수가 있다. 반면에 율법을 행하여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말씀은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증거들이 신약성경 다수의 구절에서 율법의 용도를 확실하게 밝혀주고 있다.
결과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인간의 내면에 구체화 된 죄로 심히 죄가 되게 하려고 사용하신 율법은 둘째 아담, 즉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사건에서 율법 요구의 절정, 그 완성을 보여 주시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용을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 관점에서는 성경을 근거로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명하신 율법이 첫 아담과 이스라엘 택한 백성의 죄로 심히 죄가 되게 하여 그들로 타락한 죄인이 되게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죄가 없으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 죄 있는 육신으로 출생하여 대속 제물로 죽게 하셨다. 그리하여 율법의 현상적인 용도의 효력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나타나도록 섭리하셨다. 따라서 택한 백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의롭다 함을 얻으므로 율법의 현상적인 용도에 의한 죄로 심히 죄가 되게 하는 대상에서 벗어나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구약의 모든 율법과 선지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성취해 주실 섭리에 대한 예표로서의 모형과 그림자이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작정 안에 속한 의도적인 하나님의 계시섭리이다.
그리고 율법과 선지가 불변적 언약과 예언이 아니고 인류 역사에 가변적인 인간의 자유의지가 조금이라도 가미되었다면 인간들의 좌충우돌 행동에 의해 만사가 결정됨으로 인하여 하나님은 아무 쓸모 없는 전설적인 하나의 신이 되었을 것이고, 택한 백성들에게 주신 특별계시인 성경은 예언과 성취가 불균형으로 인하여 인간들의 도덕 수준의 지침서가 되었을 것이며, 오늘날의 기독교 자체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율법의 용도는 죄로 인간을 죽게 한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금과법을 명하실 때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셨다. 그리고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율법도 범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법 조항이다. 또한, 사도 바울도 갈라디아서 3장 21절에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했다. 이러한 것을 볼 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인간들을 살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죽게 하시는 율법을 주셨다고 증거하고 있다. 로마서 7장 9절에서 11절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에서도 율법의 용도를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인간에게 율법으로 죄로 심히 죄가 되게 하셔서 죽게 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위의 본문 갈라디아서 2장 21절에 기록된 말씀처럼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한 번 더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곧 인간들이 율법으로 죽지 않고 스스로 의롭게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은 아무런 의미가 없게 된다는 뜻이다. 또한, 인간이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위반하므로 범죄인이 되어 죽게 되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 하나님의 작정에 따라 율법과 선지, 곧 구약에서의 언약과 예언에 따라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해 주시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반드시 죽으셔야 하기에 율법을 백성들에게 명하셔서 그 위범한 범죄로 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하셨음을 알 수가 있다. 율법의 용도에 대해서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이 한 번 더 요약하고 있다. “율법의 용도는 인간으로 하여금 죄인 되게 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죽게 하는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는 것이 율법의 현상적인 용도라고 한다면, 죄로 말미암아 인간을 죽게 하는 것은 율법의 본질적인 용도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창세전에 작정하신 궁극적인 목적을 이루어 가시는 데 있어서 죄가 필요했기 때문에 율법으로 인간을 심히 죄인 되게 하신 것”이라고 가장 성경적인 해답을 알려 주고 있다.

우리는 성경교사들이 율법의 용도를 성경에서 탐구하여 통일성 있게 논리적으로 교육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관점에서 정리하여 산발적으로 서술하거나 가르치는 것을 경험했다. 또한, 고대, 중세 신학자들 역시 철학과 융합적인 학문 연구를 병행하여 완성된 결과물들에서 비롯된 것이 오늘날 기독교 신학의 정체성에 혼란을 초래하는 결과를 낳았다. 결론적으로 기독교 신학의 연구는 어떠한 사색적인 탐구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성경에서 시작하여 성경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가장 성경적인 신학이다.

<다음 호에 계속>

참고문헌
박용기, 『율법과 죄 그리고 은혜』(진리의말씀사)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오현 편집국장 ((주)한국크리스천신문, 장안중앙교회 장로)
이메일 : donald257@n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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