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성경의 절대 권위와 정경 확정의 섭리 과정 (Ⅳ)
10. 수사학과 문학의 종결과 완성으로서 성경
초대 교회 당시 고대 그리스 수사학에 능통했던 교부들은 성경의 문학적 가치를 그리스 고전 문학과 대비하면서 성경은 과거 어떤 화려하고 방대한 문학보다 뛰어난 진리의 명확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도 확신을 고수했다. 즉 “성경의 단순성이 고대의 다른 작품들이 갖고 있는 화려함에 대해 승리를 거뒀다”고 칭송했다. 가령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전문 분야였던 수사학(修辭學)을 중심으로, 성경이 지닌 문학 작품으로서 탁월성을 강조했다. 그는 네 가지 원칙을 수립한다. 1. 성경 기자들은 고대 수사학의 일반적 규칙을 따랐다. 2. 성경의 웅변과 그 아름다움은 고유한 가치가 있다. 3. 성경의 문체와 메시지 내용은 분리될 수 없다.(현대 문학 이론의 토대 역할을 함) 그리고 4. 성경의 문학적 수사법은 인간의 기교로 불가능하며 오직 하나님의 의지에서 비롯한다.(169) 이하에서는 이러한 수사학적 전통이 어떻게 성경 권위와 연관되며 나아가 성경을 인간 상상력의 산물로 취급했던 ‘성경학’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수사학과 문학에 대한 초대 교회 전통은 16-17세기 종교개혁 시기와 그 이후 ‘성경과 문학의 통합’ 문제로 향했다. 종교개혁자들과 그 후예들은 성경을 하나님이 주신 ‘계시 문학’(revelational literature)으로 보고자 했다.(170) 하지만 계시의 신적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은 르네상스 전통에 속한 문학가들은 성경도 일반 문학 작품처럼 ‘상상에 의한 문학(imagivative literature)’으로 분류했다. 이들은 성경을 “인간 경험의 구체성 혹은 회화성”(170)으로 분류하고자 했다. 성경은 문학 장르로서 그 구조는 상징적이며 시적인 것으로 주로 “상징주의라는 장치에 의존”(170)한다고 보았다. 그 결과 성경은 문학 작품으로서 독보적인 신적 권위는 사라지게 된다. 인문주의를 신봉하는 작가들에게 성경은 문학적 해석에 종교적 의미를 가미한 결과물이다. “성경에 대한 문학적 해석이 성경을 거룩한 책으로 여기는 종교적 믿음과 병행”(170)하는 것으로 보고자 했다.
성경에서 신적 권위나 종교적 믿음을 점점 제거하면서 ‘낭만주의’(대략 프랑스 대혁명 시대인 1780년부터 1850년대 무렵) 시대에 이르면 성경은 (신적 계시의 권위가 아니라) 오직 문학적 측면의 가치만 부각된다. “성경의 세계에 내포된 원시적 단순성”과 “성경의 여러 시들이 갖고 있는 열정적인 숭고함”(171)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약화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원시적인 것과 열정적인 것에 대한 선호 이유는, 성경의 신적 권위 확증이 목적이 아니라, 서구 사회의 세속화가 가속화함으로써, 시인들이 “인간의 삶 속으로 영적 실재”를 주입하고자 성경에서 “예술의 위대한 암호”(171)를 찾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을 라이켄은 이렇게 정리한다. “낭만주의 시인들은 문학의 원천과 모델로서의 성경에는 관심을 가졌으나 종교적 믿음의 원천으로서의 성경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172) [필자는 이 자체가 종교개혁자들이 외쳤던 ‘성경권위’가 그 시대 문학가들을 진리의 말씀으로 심판하는 역사로 보고자 한다.] 성경 자체의 신적 권위보다는 현대 문학의 원천과 모델로서 간주하고 성경을 도용(盜用)하는 상황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으로서 성경 권위의 ‘살아 있는 운동력’(히 4:12)이 낭만주의를 심판한 것이며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는 그 이후 서구 주도의 문학비평가들에도 이어진다.
이 중 대표적 문학비평가가 The Educated Imagination의 저자 노스럽 프라이(Northrop Frye, 1912–1991)이다. 그는, 신적 권위가 아닌, 세속적 문학 서클 안에서 인간 상상력의 산물인 문학 작품으로서 ‘성경’에 대한 교육을 강조한다. 그의 말이다. “성경은 문학 교육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지층을 이룬다. 그것은 우리의 정신의 밑바닥까지 스며들 수 있도록 아주 초기에 그리고 아주 철저하게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훗날 나타나는 모든 것들이 그것에 의존할 수 있어야 한다.” 얼핏 성경의 권위와 그 가치를 강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성경이 오직 인간 상상력의 산물인 문학 작품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한다. 그의 이러한 성경에 대한 평가는 문학 분야에 영향력을 미쳐서 ‘성경학(biblical scholarship)’에 대한 관심을 고조시켰으며 “신학적이고 역사적인 해석에 대한 집착이 문학적 분석 방법에 자리를 내주는 패러다임의 변화”를 야기했다.(173) 그 결과 1990년대 성경 연구가 대학에서 문학비평 과목으로 큰 인기를 끌었으며 이는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가 아닌 인간 상상력의 산물로서) 성경에 대한 ‘문학적’ 관심을 촉발했으며, 이는 성경 권위 확증을 위한 성경 연구 방법을 인문학의 문학비평 방법에 그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이로써 이제 성경 본문은 현대 문학비평의 도구—구조주의, 탈구조주의, 내러티브 비평 도구—로 그 가치가 격하한다. 필자는 이러한 과정이 ‘살았고 운동력 있는 하나님 말씀의 운동력’(히 4:12 참조)에 의한 하나님의 관리와 통제와 심판의 역사로 보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을 인간 상상력에 의한 산물로서 규정하는 성경학에서 말하는 성경의 독특성은 “하나님 중심성과 초자연적 정향(定向)”(176)이다. 고대 문학들과 다른 독특성은 성경은 “더욱 일관되게 세상의 삶의 일상적인 영역 속으로 침투해 들어오는 하나님의 세계”(176)를 보여준다고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신적 영감이 갖는 권위’라는 평가까지 이끌어 내었으며, 이는 성경 진리에 대한 절대성을 극대화하는 평가까지 이르게 된다. 이러한 성경의 전제적(專制的) 특성에 대해 영국의 문학자이며 비평가이고 또한 변증가였던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는 이렇게 정리한다. “성경의 많은 부분에서 그것의 모든 내용은 암시적으로 혹은 명시적으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라는 말과 함께 소개된다. 성경은 …… 단순히 거룩한 책이 아니라 철저하게 그리고 지속적으로 거룩한 책이기에 단지 심미적이기만 한 접근을 요구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접근을 배제하고 거부한다.(The Literary Import of the Authorized Version, 32-33)”(177)
이렇게 성경학은 문학 비평을 통해 성경 기록에 대해 거룩성과 문학적 심미주의까지 넘어서는 권위가 있다는 평가에 이르게 된다. 성경을 장르 면에서 문학 작품과 문학 비평의 범주에 귀속하는 것은 근본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는 앞의 평가는 성경학에 대한 출발 자체가 오류이며 근시안적 한계임을 드러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루이스의 평가처럼 성경이 문학 작품을 평가하는 심미적 관점을 거부하는 기록이라면, 사실상, 더 큰 과제가 남는다. 과거에 신적 권위의 말씀으로 해석했던 관점들-대표적으로 구속사적 관점이나 하늘나라 관점-이 아닌 다른 해석학적 틀을 제시해야 한다는 점이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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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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