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원어 성경과 교의신학
지금 우리가 원어 성경을 제대로 알도록 먼저 마땅한 요소들을 간단히 살피는 중이다. 오늘은 여섯째로 교리와 관계를 다루려고 한다. 누구나 언어라는 안경을 끼고 만물을 보고 헤아린다. 거기에 사상의 틀까지 이미 갖추었기에 인식하지 못하지만 이것을 조심해야 한다. 성경 원어에 대해서도 저마다 선입견, 편견을 지닌다. 누구나 겨레와 나라에 속해 있기에 이것이 다른 나라 말에 미치는 힘이 엄청나다. 지나온 때 곳의 영향에서 누가 벗어날 수 있겠는가? 신학 사상만 아니라 사관 중 언어관까지 두루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보편 하면서도 객관으로 따져야 한다. 원어 성경에 얽힌 숱한 매듭과 타레를 가려볼 줄 알아야 정당하다.
하나님 말씀인 성경을 공부하는 방식 중 주경학과 교리학이 핵심이며 으뜸이다. 너절한 과목들이 주름잡는 현대신학이란 이미 배교를 부채질한다. 교리란 성경해석의 열매를 간추린 것인데 교회 안팎에서 벌어진 일을 성경으로 규명한 것이다. 진리교육과 변증 두 방면에서 교회를 지키고 세운 성령님 열매이다. 성경과 교리 관계란 미묘하고 오해를 일으킬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교리에 나타난 온갖 세속주의 요소를 가려낼 줄 모르면 이성주의로 전락하여 성경을 곡해한다. 자유주의신학에서 원어 성경을 여러 가지로 철저히 파괴한 결과로 주경학과 성경 번역에서 이미 세계 신학계는 빗나갔다. 교의학도 서양철학의 노예일 뿐이다.
성경을 알고 믿으면 신앙고백으로 나타난다. 교리란 성경을 초석 삼고 정통해석을 계승하도록 이끈다. 개혁파 교리가 으뜸인데 깔뱅이 그 기초를 놓았다. 초대교회 교리를 깔고 16세기에 강요를 통해서 성경 전체를 간추렸다. 그가 시대와 사명의 한계 가운데 가르치고 고백한 것을 알아야 한다. 여기서 주목할 건 깔뱅이 예배 때 성경만 가르쳤고 또 성경을 번역한 사실이다. 그가 교회를 세운 열매로 성경관을 증거했는데 원어 성경관을 주목해야만 한다. 흔히 종교개혁 그러면 다른 것들을 늘어놓는데 개혁자들이 성경번역에 하나 같이 참여했다. 그 중 깔뱅이야말로 원어 성경 번역과 강요를 한평생 손질하면서 성경 권위를 증거했다.
교의학이란 성경을 알도록 심부름하면 그만이다. 성경 원어와 그 해석으로 주경학을 갖춘 교의학이라야 정통이다. 지금 이런 교의학자가 있는가? 혹시 한둘 있다 해도 변질한 비평 원어 성경관에 물들었기에 정통교의학에서 빗나갔고 헤맨다. 각국 성경공회에서 번역하는 현대역본들을 보면 얼마나 빗나간 교리에 물들었나 단박에 안다. 전통원어성경과 전통번역성경에서 나온 교리라야 올바로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을 모르면 교조주의로 전락하여 성경에서 벗어난다. 교리 연구에서 신학이 나타나는데 교리와 그 해석이 빗나가면 또 신학은 오죽하겠는가? 현대신학에서 원어 성경 연구란 형식 치레이고 도무지 제대로 가르칠 수 없다.
계시를 력사의 무대에서 언어로 기록하셨다. 교리작업도 성경을 가지고 당대의 언어로 서술했다. 성경 말고는 모든 성경 연구의 열매란 신학이다. 이것을 깊이 생각하자. 신학연구에 들어가는 세상 요소와 사람의 속성을 알며 언어와 력사의 영향을 철저하게 따져야 한다. 성경 원어도 히브리말과 아람말, 헬라말로 이루어졌기에 계시의 성깔과 언어의 한계를 갖는다. 교리연구 조차 섭리 가운데 여러 나라 말로 이루어졌기에 원어성경에 미치는 힘을 주의깊게 살펴야 한다. 먼저 우리말을 력사의 무대에서 제대로 갖추고 써야만 세상 언어학이 원어 성경을 망가뜨린 것을 찾아 가려낼 수 있다. 세상 문법으로 성경 원어까지 뿌리 깊게 곡해했다.
흔히 교리로 성경을 해석한다고 한다. 성경 자체로 교리를 까발리지 않으면 교리해석이란 성경권위를 깔본다. 세상 철학으로 성경 진리를 다룬다는 말이다. 성경 연구와 성경 강론으로 교리가 이루어지는데 원어 성경과 역본 성경에 문제가 있다면 교리작업이 정당하겠는가? 교리언어들이 서방언어들인데 계시 언어들을 제대로 소화하기 어렵다. 언어특성에서도 나타나지만 성경해석에서 더욱 그러하다. 문법해석이든 신학해석이든 교리의 영향에서 못 벗어난다. 그래서 원어 성경을 번역하고 해석할 때 신학 언어 특성으로 뜻을 어느 정도 드러내지만 오히려 원어 성경의 뜻을 곡해하기도 한다. 이런 사실을 놓치면 원어가 세상 언어에 휘둘린다.
서구신학이 어리석은 오만으로 원어 성경을 학문의 대상으로 떨어뜨렸다. 그동안 헬라 말에 주눅 들었는데 범어라든가 새로운 언어리론으로 원어 성경연구에 다가섰다. 여기에 또 한축은 현대 이스라엘이 구약 원어를 가지고 주인인 양 성경을 변질시켰다. 예호바 이름 표기와 발음부터 신약을 현대 히브리어로 번역에서 변질시켰다. 이것을 분별할 수 있는 언어가 유일하게 우리말이다. 빗나간 성경 번역은 빗나간 선포로 빗나간 교리를 만든다. 유대주의가 비평주의랑 한통속으로 원어 성경을 주무른다. 여러 세속방식을 곁들여서 속이기에 정통신학에서 속수무책이라. 여기에 우리말이 철저하게 뒤틀리고 세속법으로 재갈을 먹여서 뒤뚱거린다.
그래서 언어를 갖추지 못하면 교리관을 제대로 형성할 수 없다. 히브리말과 헬라말의 차이를 정리할 수 없으면 어떤 교리를 만들겠는가? “기독” 과 “그리스도” 같은 말을 무작정 쓴다면 의도를 모르고 아무리 정통이라고 해도 속는다. 다른 나라 사람이 아니라면 몰라도 배달겨레로서 정통신학을 계승발전 시키는데 아무런 구실을 못한다. 우리 언어구조조차 뿌리 째 달라졌으니 어떻게 원어와 교리를 올바로 깨닫고 해석하겠는가? 오롯한 언어가 없을지라도 인도유럽어 문법에 자팬말투로 만든 한글을 쓴다면 이미 우리 사상이 변질한다. 우리 언어가 망가졌는데 아무리 애써도 원어와 교리에서 서구신학을 분별 못 하고 그저 답습한다.
원어 성경을 신학의 한 축인 교의신학에 비추어 간단하게 다루었다. 계시언어와 교리언어를 알파벳 첫 글자로 견주어보면 알레프와 알파가 다르다. 또 헬라어와 라틴어도 알파벳부터 차이난다. 서구 문법과 자팬발음 체계로 근본이 변질한 한글이라 원어랑 교리를 충분히 연구할 수 없다. “삼위일체” 라는 표현도 뒤틀린 우리 언어구조 속에서 그 본질을 파악하기 어렵다. 알파벳관이 어휘관으로 이어지고 계시표현과 해석표현에서 나타난다. 우리말을 훈민정음부터 다시 연구하여 제대로 세워야만 소리 하나라도 깔보지 않고 낱말 하나라도 섣불리 다루지 않게 된다. 모든 언어가 지닌 특성을 파악하고 우리말로써 한걸음 더 나아간다.
원어성경을 바로 갖추어야 교리체계 부터 새롭게 손질한다. 주경신학 부터 새롭게 개혁해야 교의신학을 새롭게 개혁한다. 우리말 성경부터 바로잡아야만 정통신학을 제대로 깨닫고 개혁한다. 이것을 모르면 사대주의 수입신학을 못 벗어난다. 예수스 흐리스토스가 언약 따라서 오신 때 배교한 유대주의가 식민지 가운데 어떠했는가? 언어를 잃으면 력사를 잃고 자기인식이 불가능하다. 거룩한 줏대를 성령님 사역으로 갖추어야만 정통신학과 신앙을 계승 발전시킨다. 뿌리인 언어와 력사부터 찾아서 가다듬고 성령님이 연장으로 써주셔야 교리주의를 벗어나고, 원어 성경으로 제대로 교리를 해석하여 바른 교회를 성경 진리로 세우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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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리종연 목사 (서울진명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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