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원어 성경과 성경 강론
원어를 잘 안다는 사람들이 설교를 못한다는 말이 있다. 그 바람에 원어무용론도 설친다. 무엇을 잣대로 설교를 론하는지 모르나 원어성경을 제대로 안다면 왜 말씀을 옳바로 다루지 못하겠는가? 지금 설교학을 말하는 자리가 아닌데 원어성경을 통해서 성경을 풀이한다면 어떻게 해야 마땅할까? 앞에서 몇 가지 도틈으로 원어 성경의 성깔과 쓰임새를 다루었다. 설교든 강론이든 이런 말투들이 지닌 속뜻을 제대로 알고 써야 하리라. 아울러 왜곡된 모습들도 심각하기에 조심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아무나 아무렇게나 풀어 밝힌다고 성경 강론이겠는가? 원어 통한 강론이 성경계시를 밝히는 성령님 사역의 열매로서 교회 세움의 초석이다.
성경을 어떻게 풀어 밝혀야 성경에 맞을까? 여기서 관련된 모두를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마땅히 알고 갖출 기본을 먼저 말하고 원어성경과 성경 강론의 뜻을 조금 다루고 싶다. 우리가 무엇보다 붙들어야 할 연장이 우리말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장 모르고 깔본다. 그러니 무지하고 무책임한 설교들로 가득하다. 하나를 알면 다 알고 하나를 모르면 다 모른다는 말이 있다. 우리말에 대한 자세를 한살매 갈고 닦음을 전제로 성경 강론 준비에 필요한 원칙을 알아야 한다. 역본 성경과 원어 성경을 어떻게 파헤쳐서 붙잡을 것인가? 이것이 너무나도 중요한 작업이다. 이미 에덴의 동산부터 사탄이 속였고 처음 사람들이 엉터리로 비틀었다.
원어 성경을 공부한다면서 단편으로 하면 하나마나가 된다. 그저 낱말풀이로 사전을 짜집기해서 써먹는 정도라면 우습다. 원어 성경을 모독하는 거짓이 지금도 계속된다. 원어 성경을 안다고 말하려면 필수요소들을 곁들여야 한다. 원어 성경해석의 실력을 제대로 갖추어야 한다. 해석을 넓혀서 말한다면 번역, 석의, 주석에 견주어서 헤아려야 한다. 이런 해석이란 우리말 성경을 읽고 이해하는 수준에 버금가도록 원어를 연구해야 가능한 일이다. 이런 사람을 만나보았는가? 서구신학을 보면 원어 성경해석에서 큰 속임과 무지로 가득하다. 따라서 나타나는 설교들을 보면 중구난방이다. 성경 번역과 성경해석에서 원문비평에 물들었다.
원어 성경연구의 꽃이 성경 번역이라면 그 열매가 성경 강론이다. 이 둘이 신학연구의 고갱이이기도 하다. 계시가 유기성을 지니듯 원어 성경도 번역과 강론에서 일체성을 이룬다. 언제나 교회개혁에서 계시내용을 어떻게 드러내야 마땅한가를 분명히 해야 한다. 지난날 서구선교사들이 선보인 설교형태를 아직도 답습한다. 이제 그마저도 사라지니 권위주의에 따른 계율주의와 형식론리가 지배한다. 성령님이 전권으로 성경을 풀어 밝히심으로 예수스를 흐리스토스로 증거해야 거룩한 몸이 세워지는데 이런 교회가 얼마나 있는가? 요즘 류행을 따라서 설교에 써먹는 원어 단어 실태를 보면 안타깝다. 해석이 빗나간 겉치레는 강론이 아니다.
간추리면, 강론이란 정통계시관에 근거한 해석원리에 맞아야 한다. 여기서 원어 성경의 구실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어떤 구절을 강론하던 성경을 놓고 수립한 신학 원리에 비추어 해석한 열매이다. 현대교회는 개혁자들이 계승받아 성경번역에 쓴 원어 성경을 내버린 상태이다. 그래서 모든 나라의 성경 번역을 보면 심각하게 빗나갔다. 배교한 증거의 하나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거나 무관심하다면 그게 무슨 강론인가? 성경계시에서 더하거나 덜면 어찌 된다고 경고하셨는가? 성경관에 속한 모든 방면에서 하나라도 빗나가면 어찌 되겠는가? 우리말 성경을 겉에 적힌 내용조차 제대로 충분히 알고 정리한 설교자를 별로 만난 적이 없다.
히브리말과 헬라말을 잘 아는 듯 내세우는 경우도 우리는 조심스레 눈여겨보자. 한 통으로 한 권으로 보고 꿰뚫은 연구와 강론으로 체득한 바가 없다면 빗나가기 쉽다. 요즘 원어에 관련한 책들이 다양해서 그것만 보아도 좋다고 함부로 말하는데 어찌 편법이나 결과주의로 악용하는가? 서구 언어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원어 성경관이란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는 어리석음이다. 원어 관련 저작들을 거의 모두 자유주의 비평신학으로 만들었다. 이것을 가려낼 힘이 없다면 섣불리 손대지 않아야 한다. 누가 어떤 방식과 목적으로 쓴 책인가? 이런 정도를 잘 가려내서 변증으로 비판해낼 힘이 있어야만 한다. 진리싸움이 종말계시에 핵심이다.
‘강론’이란 표현을 개역 성경에 보면 신명기와 특히 사도행전에서 돋보인다. 먼저 신명기 6장 7절과 11장 19절을 보면 같은 내용이다. 갈다와 이야기하다, 가르치다와 이야기하다로 평행 성격이 보인다. 모두 이야기하다[다바르]인데 특성에서 갈다[샤난]와 가르치다[라마드]로 힘주어 기록했다. 신약에서 디알레고마이와 에크티쎄미 두 말씀이다. 그런데 각각 13번과 4번 나오는데 개역에는 합쳐 10번만 강론으로 나온다. 앞에 것이 변증[변론]이라면 뒤에 것이 꺼내놓음이다. 이것을 사도행전 28장 23절에만 강론이라고 뒤쳤다. 한자로 講論인데 특히 헬라어 뜻을 담은 낱말로 받으면 좋겠다. 다만 몇 차례 달리 뒤친 게 아쉽다.
강론의 말뜻을 조금 살펴보았는데 그저 앵무새처럼 다루는 게 강론이 아니다. 사도행전 11장 4절과 18장 23절도 에크티쎄미[꺼내놓다]로 나온다. 철저히 연구하여 때에 맞게 말씀을 풀어 밝히는 것을 말한다. 그 성경신학을 수립하는데 강론 과정이야말로 필수이다. 성령님 사역으로서 거룩한 몸을 세움으로 증거하시기에 그렇다. 꺼내놓다를 파울로스만 쓴 낱말이고, 말씀다룬다는 디알레고마이도 재귀꼴로서 말하는 주체와 강론사역을 힘준다. 세 차례만 마가, 히브리서, 유다서에서 같은 뜻으로 사용한다. 간단히 살펴보았듯이 강론이라는 게 함부로 흉내 낼 수 있는 일이 아니고 사도행전에서 특히 파울로스를 통해서 신약교회를 언약 따라 세우는데 성경해석을 전제한 강론으로 대표하는 방편이다. 히브리말과 헬라말이 아주 잘 어울린다.
결국 신약계시를 성령님이 적도록 이끄셨는데 강론이라는 방식을 주셨다. 적어도 구약 히브리어성경을 어떻게 연구했는가를 알아야 헬라말로 된 신약성경을 보는 눈이 정당하다. 히브리말투와 언약사상이 헬라말투에 오붓하게 녹아있다는 말이다. 계시를 음역이라든가 여러 방식으로 뒤칠 때 마쉬아흐가 흐리스토스라는 것을 증거했기에 원어성경을 잘 알아야 마땅하다. 나아가 우리말 번역 성경이 더욱 중요하지만 강론하는 교사가 더더욱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강론 말씀을 듣는 성도들도 할 수 있는 대로 성경 해석과 성경 강론의 관계를 알고 받아야 한다. 성령님이 말씀을 듣도록 귀를 여시고 마음의 눈을 밝혀주도록 이끄셔야 한다.
원어성경에서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어떻게 가르쳤는가 확인해야 한다. 역본 성경이 계시의 고갱이를 이어받아서 어떻게 증거했는가 눈여겨보아야 한다. 구약신학과 신약신학도 구별하지만 하나로 나타나기에 원어성경을 근거로 바른 역본을 가지고 옳바르게 우리말을 새롭게 가다듬으면서 강론해야 한다. 말글이라는 계시방편의 마지막 연장을 잘 마련하여 우리말로 하나님 말씀을 강론해야만 한다. 배달말이라는 맨마루 언어를 받았으니 세계교회와 신학계를 위해서도 언어관을 줏대 있게 개혁해나가야 한다. 우리말의 현주소를 모르는 원어 성경과 성경 강론이란 있을 수 없다. 사탄이 장악한 언어이고 부패한 언어이기에 조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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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리종연 목사 (서울진명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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