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성경적 오류를 진단하다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좌담회
객원기자 지난 호에서 교회의 권징 및 교회의 대회와 총회에 관한 고백서 내용에 대한 분석과 비평의 시간을 가지면서 비성경적 독소(毒素) 조항에 대해 비판과 분노까지 토로하셨습니다. 좌담회가 우리 기준에 맞지 않는 주위의 한국 교회를 단지 비난이나 비판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현재 한국 교회에서 일어나는 부정과 불법의 원천이 성경에 대한 무지와 왜곡에서 비롯한다는 점을 분명히 진단하고, 나아가 한국 교회가 성경진리에 입각한 바른 교회로 개혁되어지도록 그 길(www.ibt.or.kr)을 제시하는 데 좌담회의 목적과 사명이 있음을 거듭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지난 좌담회에서 고백서 제30장에 나타난 교회 직원 특히 목사에게 주어진 ‘천국 열쇠’에 대한 불법적 요소를 분명하게 지적했습니다. 그리고 제31장에서 그러한 목사의 권한을 보호하고 옹호하는 기구인 상위기관의 대회나 총회의 비성경적 부분에 대해서도 살폈습니다. 오늘 좌담회에서 다루고자 하는 제32장과 제33장도 앞선 주제와 연결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논리적 연결성이 있다면, 제 소견으로는 충격적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목사의 발언이 대회나 총회의 지원과 후원을 업고 성도와 교회 지배에 대한 무소불위의 권위를 갖는다면, 성도의 부활과 심판에 대한 최종 권한도 목사가 장악하고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적그리스도’의 행태가 아닌가 합니다.
박홍기 연구원 지금 기자님이 지적하신 부분에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오늘 다루고자 하는 ‘제32장 죽음 이후의 상태와 부활’ 그리고 ‘제33장 최후 심판’은 지난 제30장과 제31장을 반드시 연결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고백서 작성자들이 의도했던 아니든 상관없이 말입니다. 마태복음 16장 18절의 삼인칭 사건인 ‘이 반석(베드로의 고백)’을 마치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준 것으로 오역하고, 그리고 19절은 천국 열쇠의 모든 권한은 전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임을 강조한 내용을 마치 제일 먼저 베드로가 받은 것처럼 왜곡하고 있습니다. 이 바탕 위에서 성도들은 죽음 이후와 부활 그리고 최후 심판을 대하고 있습니다. “목사님, 저 죽은 다음에 어디로 가나요?”라고 묻는 순간, 죽은 다음의 내 영혼은 ‘천국 열쇠’를 가진 목사의 손아귀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저는 최후 심판 때 천국 가려면 어떻게 하면 되나요?”라고 묻는 순간, 목사의 지위는 그 질문을 던진 성도에 의해 천국과 지옥을 결정하는 대리 심판자의 자리까지 높아집니다. 이 두 가지 질문은 목사가 대답할 수 없습니다. 올바른 목사라면 해당되는 문제에 대해 성경적 근거를 정확하게 제시하고 설명하는 것으로 끝나야 합니다. 그런데 목사가 ‘천국열쇠’를 가졌다고 비성경적으로 확정함으로써 모든 성도들은 천국 가는 문제를 목사가 결정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목사의 말에 얽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에 대한 문제, 더 정확히 말하면 천국 보내는 권한에 대해 도전하면 정관이나 노회법을 도용하여 ‘이단 시비’ 속에 몰아넣고 임사부의 막강한 권징 절차를 통해 잘 돌봐야 하는 성도들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벌어집니다.
앞의 문제를 가지고 제32항 1~3항을 비판적으로 접근해 보겠습니다. 조항 내용을 보면 사람들의 영혼은 의인의 영혼과 악인의 영혼이 있다고 합니다. 의인의 영혼은 하늘나라로 가고 악인의 영혼은 지옥으로 갑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모두 부활하는데, 불의한 자의 몸은 부끄럽게 되고 의인의 몸은 그리스도의 몸과 같이 영광스럽게 된다고 합니다. 문제는 의인과 악인을 누가 결정하며, 의인의 몸을 부활하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지가 더욱 중요하게 됩니다. 목사의 ‘천국열쇠’ 부분과 지금 제시한 내용과 연관시키면 성도들이 의인으로 부활하기 위해서는 천국 열쇠를 가지고 있는 목사의 지도와 권징을 따라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사의 ‘천국열쇠’와 ‘권징권한’ 다음에 성도들의 부활을 배치하는 고백문의 내용과 구성에 대해 강도 높은 비판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의도적으로 이렇게 배치했다면 ‘적그리스도’적인 의도라고밖에 볼 수 없습니다. 죽은 이후의 세계도 관리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이 발상을 어떻게 개혁파 교회의 전통으로 둘 수 있단 말입니까, 당장 폐기해야 할 악법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고백서의 불법적 요소들이 얼마나 인위적으로 총회 헌법에 명문화된 법처럼 고착화되어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SH연수생 연구원께서 아주 흥분할 정도로 매우 심각한 악법 구조 속에서 한국 교회가 실상은 종교개혁의 전통을 따르기는커녕 오히려 포기하고 1000년 동안 부패한 로마 가톨릭보다 더 심각한 경우임을 실감하게 됩니다. 제32장 2항에 보면 성경 해석상 매우 심각한 오류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2항에 보면 부활시 ‘본래와 같은 몸으로 부활할 것’이라고 하며, ‘같은 몸으로 영혼과 다시 결합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 근거로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본문은 육의 몸 이후에 올 부활의 몸이 얼마나 영광스러우며 현재 고난 가운데 있지만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분명한 언약임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본문을 ‘같은 몸으로 부활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정말이지 고백서 작성자들의 성경 이해 수준을 의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령,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처참한 죽음으로 지킨 자가 부활하면 처참한 모습으로 부활하게 된다는 것이죠. 얼마나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순교했는데 부활의 모습을 이 정도로 이해한 것은 정말로 유치하다고밖에 할 말이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6장 9절에 보면 많은 순교자의 영혼들이 등장합니다. 하늘에 속한 영원한 생명으로 살아가는 신앙인들의 ‘모습’은 다른 차원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한 모습을 기준으로 영원한 천국의 부활 차원을 함부로 판단하고 있는 제32장 2항은 고백문을 읽는 성도들에게 거의 유익함을 줄 수 없는 부분이라고 봅니다.
P연구생 목사의 심판권에 담긴 비성경적 독소 조항을 염두에 두면서 제33장 ‘최후심판’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제1항에는 하나님의 심판 날이 정해져 있다고 하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심판 권세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심판대 앞에서 자신이 한 말과 행동을 고백하고, 자신이 선악 간에 행한 대로 보응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판 날을 정하신 목적은 택한 자들에게는 자비의 영광을 주고 불순종한 악한 자들에게는 심판하여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하기 위함이며 그 심판 날이 언제인지 성경은 밝히지 않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최후 심판을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범죄 하는 것을 막고 경건한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최후 심판은 인간의 의지적 노력에 따른 행위 여하에 따라 실시되는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하나님 기준의 선악 간에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뜻에 따른 주권적 통치입니다. 인간의 양심을 자극하여 선한 양심을 가지도록 유도하면서 최후 심판이 확실히 있다고만 강조하면 성도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천국열쇠’를 가진 목사의 말에 얽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33장 3항에서 모든 사람들이 범죄하지 못하도록 최후 심판을 가르친다는 말은 개혁파 구원론의 본질을 정면으로 뒤집는 것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으로 완성되었고, 이는 성도의 불가항력적 은총과 궁극적 구원으로 이어진다는 칼빈주의 핵심 교리 속에도 나와 있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러한 칼빈주의 5대 강령마저 팽개치는 모습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최후 심판 앞에 교회의 권징과 천국열쇠의 목사 소유권 그리고 목사 중심의 대회와 총회 구조는 정말로 ‘악의적’ 배치라는 생각이 다시 듭니다. 몰라서 그랬다면 매우 딱한 일이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구성했다면 이것은 중세 로마 가톨릭의 구원관으로 다시 돌아간 대참사 사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객원기자 370년 전 신앙고백 작성자들이 ‘부활체’를 이해한 것이 매우 피상적이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부활체를 이해할 때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을 이해하는 것과 직결된다고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체는 예수님이 ‘다시 재생(再生)하게 한’ 나사로의 경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라고 봅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운명하실 때 무덤이 열리면서 죽었던 사람들도 재생합니다. 구약에도 보면 사르밧 과부의 아들, 수넴 여인의 아들이 죽었다가 재생합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생명의 원천이 되시고 생명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와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재생한 몸은 반드시 다시 죽고 흙으로 돌아간다고 봅니다. 하지만 부활체는 영원한 생명체가 그 본질이기 때문에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작성자들은 생명 자체이신 예수님의 부활체와 인간의 재생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활체와 최후 심판에 대한 성경적인 논의를 좀 더 심층적으로 하면 어떨까 합니다.
박홍기 연구원 부활체에 대한 성경적 논의는 박용기 원로님의 『무엇인가 4』에서 잘 다루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보면 ‘부활은 영적으로 죽은 타락한 인간이 중생 여부와 관계없이 세상에서 육신으로 살다가 죽은 후에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살아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거듭난 자와 거듭나지 못한 자가 세상의 종말에 영원히 죽지 않는 신령한 몸으로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을 하게 됩니다. 택자는 중생함으로 살다가 죽음 후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의 부활’로, 불택자는 죽은 영의 상태로 그대로 살다가 죽음 후 영원히 죽지 않는 ‘심판의 부활’을 받게 됩니다. 중요한 점은 ‘부활체’가 영원히 죽지 않는 상태로 ‘생명체’와 ‘사망체’로 인간의 상상력으로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차원을 계시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점을 간과하면 단지 성경에 나타난 ‘재생(再生)’하는 사건들 수준에서 부활을 상상하는 것으로 머문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부활체에 대한 이해는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직접 연관되는 문제임을 알 수 있으며, ‘생명’에 대해 ‘하나님의 근본 특질’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는 하나님 존재의 결정적 특징이 바로 ‘생명’이기 때문이죠. 영원히 죽지 않는 상태인 부활체로 변형한다는 것은 바로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의 존재의 계시 완성과 연관되는 사건으로 보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지금 연구원이 말한 대로 저는 『무엇인가 4』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개념을 다루었습니다. 부활은 영적으로 죽은 타락한 피조물이 중생 여부와 상관없이 하나님과 같은 죽지 않은 영원한 상태로 변화하는 사건입니다. 창조 시 에덴동산부터 요한계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에 이르는 성경 전체의 과정은 다르게 말하면 모든 인류가 육신으로 죽은 후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하게 하시는 과정이라고 해도 빗나가지 않는다고 봅니다. 나아가 이러한 부활 상태는 영원히 죽지 않는 상태로 완성된 인간들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찬양케 하시려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부활체로 변화하는 과정은 결국 생명 자체이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영원한 계시와 직접 연결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근본 특질’인 생명 즉 ‘하나님의 근본적인 특별한 본질’인 생명과도 연관됩니다. 사실 지금 다루는 부분들은 인간의 이성적 판단력과 상상력으로는 함부로 말할 수 없는 부분들입니다. 제가 주장하는 ‘언약성취섭리사적 성경신학’은 성경 전체를 논리적 모순 없이 여호와 계시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이 핵심입니다. 즉 부활에 대한 이해는 성경의 논리적 통일성과 구조적 완벽성을 확실한 근거로 제시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가 없다고 봅니다. 인간들의 상식적 이해와 판단으로 성경을 설명할 수 없듯이, 부활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국어사전적 이해를 통해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도 고린도전서 15장 42~44절에 근거를 두고 부활체를 설명하고 있으나 그것은 성경에 그렇게 나와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그 내용을 재서술하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부활체는 결코 ‘재생’ 차원의 존재가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과 형상의 차원에서 영원한 세계에 속한 부활체를 거론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전통신학은 ‘사람들 곧 타락한 아담 후손들이 육체가 되었다’(창 6:3)는 말을 깊이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류의 지각(知覺)으로 부활의 상태를 이해하기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에베소서 4장 6절을 보면 하나님 곧 만유의 아버지는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합니다. 만유 가운데에 계신다고 해서 우리의 이해와 지각으로 파악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범신론’이나 ‘만유재신론’의 시각으로는 알 수 없는 신령한 차원이며 피조 세계를 초월하면서도 피조 세계를 통치하는 영적인 상태라고 봅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피조 세계는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생명의 기운(氣運)이 계시되는 곳이라고 할 수 있죠. 예수의 부활하신 몸은 분명 피조 세계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피조 세계를 통치하고 계십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시간과 공간과 형상을 초월하는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간단히 말하면 부활에 관한 논의의 무게 중심이 영존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계시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데, 전통신학은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받을까, 그래서 다시 살아나 천국에서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로 접근하다 보니 그 신묘막측한 부활의 상태와 나아가 영원한 생명 자체이신 여호와에 대한 깊이 있는 지식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봅니다. ‘심판’도 마찬가지입니다. 전통신학은 성도들을 겁주고 그들의 신앙생활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심판을 ‘악용’하고 있습니다. 심판주이신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습니다. 저는 『무엇인가 4』에서 심판을 ‘창세전에 작정하신 뜻대로 선과 악을 구별하여 처리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적 통치 행위’라고 정의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에 초점을 맞추어 보면, 심판이나 부활이나 모두 여호와 하나님의 능력의 영광을 찬양하는 개념들이지 인간의 구원을 위해 이렇게 저렇게 사용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강조하고 싶네요. 앞서 누군가 지적했지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도 천 번 이상 성경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 자체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하지 못한 상태에서 맥락이나 신학적인 깊은 이해 없이 이곳저곳을 원칙 없이 인용하다 보니 성경권위를 더 추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고 봅니다. 이것은 부활과 심판을 설명하는 데도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고백서는 결국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사역을 이해하는 데 가장 밀접한 개념인 부활과 심판도 너무도 조야한 차원으로 전락시켰고 성도들을 겁주고 통제하는 용도로 왜곡하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우리의 사명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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