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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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1-09 19:3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권징이 부족한 교회


우리는 교회의 3대 표지에 대해 이렇게 배우고 가르친다. 그 첫째는 말씀의 진정한 선포요 둘째는 성례의 정당한 거행이요 셋째는 성실한 권징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진정하게 선포되지 않는 곳은 아무리 교회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정상적인 교회라 볼 수 없다. 또한 성례가 신실하게 행해지지 않는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라 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권징이 정당하게 행해지지 않는 곳 역시 다른 모든 교회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진정한 주님의 교회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개신교는 교회의 삼대 표지를 말씀, 성례, 권징이라 하는 것이다. 교회라는 이름을 가지면서 말씀이나 성례가 없는 곳은 거의 없다. 그러나 교회로서 정상적인 모든 것을 갖추고 있으면서 권징이 없는 교회가 너무도 많다. 폴 워셔는 그래서 『현대교회의 열 가지 기소장』을 쓰면서 그 일곱 번째로 권징 문제를 제시한다. 교회의 권징은 주님의 명령에 근거한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권면한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교회에 권징이 필요한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순정성과 거룩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마 18:15)
많은 목사들은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신학을 뒤에 두고 나온다. 그들은 대화할 때나 사무실에 있을 때는 신학적이지만 거기서 나오면 세속적인 수단으로 교회를 운영한다. 교회가 권징을 정당하게 행하지 못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실제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교회로 끌어들여야 하는데 교인을 놓칠까 싶어 그러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 장로를 치리했다. 그런데 그 장로는 본 교회에서 불과 직선거리로 5백 미터도 안 되는 같은 교단에 속한 교회로 갔다. 그 교회에서는 아주 반갑게 맞아들였다. 대어를 수고도 하지 않고 낚아 올린 셈이다. 이런 사태는 교회들이 신학과 교회법에 무지하거나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교회의 징계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노회나 총회도 마찬가지다. 이 노회에서 치리를 받으면 다른 노회로 가면 된다. 같은 총회에 속하는 것이 싫으면 아예 총회 자체를 옮긴다. 그렇다고 자체교회가 크게 손해를 보는 것도 별로 없다. 그래서 권징을 못한다. 아니 권징을 하지 않는다. 교인 혹은 교회를 놓칠까 봐 그러는 것이다. 오늘의 교회들은 신학, 정치, 교회법 등에 별 관심 없다. 오직 내 교회만 잘 되면 되는 것이다. 오로지 목회자와 교회의 관심은 교회 부흥에 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이 세상의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다. 하나의 교회인 것이다. 주님은 교회가 구성원의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간섭하도록 명하신다. 교인 중에 죄를 범한 사람이 있으면 처음에는 교회의 지도자가 찾아가서 일대일로 권면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데리고 함께 간다. 그래서 그 증인들로 하여금 함께 권면한다. 그래도 듣지 않으면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 장로교 제도를 따라 말하자면 권면을 듣지 아니한 사람에 대해서 치리회가 간섭한다. 당회는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벌을 준다. 그 벌 중에 수찬정지라는 벌이 있다. 성찬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성찬의 의미를 깊이 있게 잘 모르기 때문에 수찬정지를 그렇게 중한 벌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정말 무서운 벌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을 받고 구원에 이른다. 구원이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의 피로, 생명으로 연합된 그 큰 구원의 사실을 재확인하고, 그 생명적 관계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성찬을 행한다. 성찬에 참여를 금한다는 것은 생명에의 참여를 금하는 것이다. 가지가 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곧 말라서 불에 태워지는 것이다. 정상적인 한 교회에서 치리를 받았다면 설령 다른 교회로 갈지라도 그는 성찬에 참여하면 안 된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노회에서 부과되는 벌도 마찬가지다. 이 노회에서 치리를 받으면 다른 노회로 간다. 그래서 총회는 이를 법으로 금하는 것이다. 정상적인 교회에서 치리를 받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법정에서 치리를 받은 것이다. 그 때문에 그 치리 받은 교회, 혹은 노회를 떠난다고 해서 그 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어떤 교회 혹은 노회에서 치리를 받으면 반드시 그 치리회에서 해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교회에 이러한 권세를 주셨다. 주님은 그의 교회에 지옥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권세를 주셨다. 천국의 열쇠도 주셨다. 교회는 천국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 권세가 있다. 그러한 교회가 정당하게 치리를 했다면 하늘의 법정도 그를 치리하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가 주께로부터 받은 권세이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

오늘의 사람들은 복잡하고 까다로운 것을 싫어한다. 원칙주의는 까다로운 사람에 속한다. 법을 주장하는 사람들 역시 까다로운 사람에 속한다. 무엇이든 쉬운 쪽을 택하고자 한다. 심지어는 그것을 은혜롭게 하는 것으로 여긴다. 그 때문에 오늘의 교회가 세속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다. 예수님 시대의 바리새인들처럼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하는 경우와 같다 할 것이다. 권징을 시행하지 않는 교회들에서는 교인들을 너무 사랑하기 때문에 권징을 할 수가 없다고 말한다. 기독교인들이 생활 가운데서 선택의 기로에 설 때에 사랑이 먼저인가 공의가 먼저인가에서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공의를 먼저라 하면 사랑이 없는 사람이 되고, 사랑이 먼저라 하면 법을 무시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기독교 윤리학에서는 개인을 대할 때는 사랑이 먼저이고 단체나 기관을 대할 때는 공의가 먼저라고 가르친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효식 목사 (전 국제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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