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장로교 헌법의 ‘헌법적 규칙’ 조항은 왜 비성경적인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憲法) 비판 11 - ‘헌법적 규칙’ 비판
장로교 헌법의 ‘헌법적 규칙’ 조항은 왜 비성경적인가?
객원기자 지난 호에서 장로교 헌법 정치 부분 중 노회, 대회 및 총회, 그리고 재산과 헌법 개정에 대해 얼마나 비성경적인지 확인했습니다. 목사의 권익을 집단적으로 옹호하는 기구로 노회와 대회, 목사의 교회 재산 독점권 방어 조항인 총회 구성과 재산 조항, 그리고 성경권위보다 위에 있는 의회와 헌법 개정의 불법성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판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개혁 특별기획 좌담회’의 일환으로 장로교 헌법에 나타난 비성경적이며 반(反)교회적 독소(毒素) 조항을 면밀하게 살피면서 비판해 왔습니다. 한국 장로교가 목사 중심적인 헌법으로 교인들 위에 군림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만고불변의 법, 곧 성경으로 돌아가 진리를 가르치는 일에 매진할 수 있길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157회부터 교회 헌법 좌담회를 진행해 왔습니다. 오늘은 ‘헌법적 규칙’에 대한 분석과 비판을 중심으로 이어가고자 합니다. 성경에 근거하여 헌법적 규칙에 나타난 비성경적인 부분을 비판해 주시고 성경적 대안을 찾는 데 유익한 의견을 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박홍기 연구원 ‘헌법적 규칙’ 전반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면 헌법적 규칙 전체 14개 조항은 비성경적이고 인위적이며 교인 관리와 목회 편리를 위해 만든 세속적 규칙이라고 규정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헌법의 규칙 대부분은 이미 헌법의 정치 조항에서 취급했는데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으로 보입니다. 여기에는 어떤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교인들의 교회 생활 전부가 헌법에서 보장을 받고 있는 목사의 권한 아래 있다는 것을 다시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것은 또한 ‘헌법적 규칙’ 다음에 나오는 ‘권징조례’를 위한 준비 단계로 보입니다. 권징조례는 주로 교인 재판과 관련되어 있는데 목사에게 유리한 판결을 하기 위해 헌법적 규칙에서 교인의 의무와 책임이 무엇인지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헌법 전체 구성으로 보면, 헌법적 규칙은 ‘정치’ 부분에 대한 불필요한 반복처럼 보이지만, 목사의 교인에 대한 지배를 상세하게 밝히고 재판에서 목사에게 유리한 판결을 도출하기 위해서는 교인의 자격과 책무를 열 번이라도 더 강조하고 싶은 의도에서 헌법적 규칙을 명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 헌법이 어떻게 목사의 교회 지배를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지를 이제까지 분명하게 확인했습니다. 헌법 규칙에서도 그 의도가 훤히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조금 더 살펴보겠습니다. 교회 조직에 대해서 규정하기를(1조), 특정한 연령이 되고 정해진 장소와 인원이 있으면 ‘미조직(未組織) 교회’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미조직 교회가 조직 교회가 되려면 목사와 장로로 조직된 당회 조직이 있어야 하고 목사들의 절대 권한으로 움직이는 노회가 허락해야만 합니다. 이는 성령의 사역을 월권하는 용납할 수 없는 규정입니다. 그리고 설립해 주면 바로 교인의 의무(2조)가 따릅니다. 교회 발전에 전력하라는 규정이 나옵니다. 교회 발전은 곧 목사의 목회 성공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현실입니다. 헌금도 잘 내야 한다고 하며 금전을 아끼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목사의 생활을 위한 것임을 ‘예배모범’ 결론에서 이미 살펴본 바 있습니다. 성경진리를 배우라는 조항도 있는데 이는 현실적으로 목사의 말에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주일 성수, 미신 행위, 음주, 흡연, 구타 등등 종교적이거나 도덕적 행위를 성도의 의무 조항에 넣고 있는데, 이는 사문화된 조항이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교인의 의무는 마지막에 ‘진리 보수, 교회 법규 준수, 목사 지시 순종, 헌법 치리에 대한 순종’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진리 보수가 가장 중요한 사항인데, 이것은 현실적으로 목회를 위한 구실로 전락해 버렸습니다. ‘진리 보수=목사 지시 순종’이 현실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헌법적 규칙의 1조와 2조는 이렇듯 목사에 의한 성도 지배를 엄격하게 법제화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교회 설립에 대한 가르침과 교회 설립의 목적을 노골적으로 훼손하는 조항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과 달리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함께 하는 곳은 조직 교회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복음서와 서신서 어디에도 이러한 방식으로 주님의 몸 된 교회를 규정하는 곳은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정치 제2장 제4조에서 미조직 교회 조항을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교회를 목사의 생활 보장(예배모범의 마지막 조항)을 염두에 두고 인위적으로 분류하여 당회가 없는 교회를 미조직의 ‘허위 교회’로 규정한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헌법적 규칙 조항을 삽입한 이유는 그다음에 이어지는 목사의 교회 지배를 확정 짓는 ‘권징조례’를 통해 목사의 지시에 불순종하는 교인에 대한 재판권을 강조하기 위한 의도가 핵심이라고 봅니다.
‘하나님 나라인 교회’의 모든 권한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으므로
목사에게는 어떤 권한도 있을 수 없다!
객원기자 지금 연구원께서 말씀해 주셨는데, 저도 사실 궁금한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헌법적 규칙은 정치에서 이미 다루었는데 왜 반복하는지, 그 이유가 결국 헌법의 결론을 목사의 권한 특히 재판권을 강화하는 것으로 끝맺고자 하는 데 의도가 있다는 점에 저도 공감합니다. 그러면 ‘헌법적 규칙’과 ‘권징조례’의 연관성을 염두에 두면서 좌담회를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이미 188호에서 ‘예배모범’에 대해서는 취급했기 때문에 앞으로 이어질 ‘권징조례’까지 염두에 두시면서 ‘헌법적 규칙’을 비판적으로 정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사족을 붙이자면, 저희 좌담회가 주로 장로교 제도 비판에 역점을 두다 보니 대안을 세세하게 말하는 데는 지면이 사실상 부족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원로께서 쓰신 『교회개혁론: 교회는 왜 어떻게 개혁되어야 하는가』를 참조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 기회가 된다면 비성경적 헌법에 대한 성경적 대안에 대한 좌담회가 이어지길 바랍니다.
P연구생 지금 기자님과 연구원께서 짚어주신 대로 정치 조항에서 세세할 정도로 교회와 정치를 취급했는데 헌법적 규칙에서 반복해서 강조하는 이유가 있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교회와 성도에 대한 목사의 막강한 실력 행사 조항인 권징조례를 위해 헌법적 규칙을 군더더기이지만 반복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하에 보면 교인의 의무 즉 출석 의무, 헌금 의무, 목사에 대한 순종 의무, 헌법 준수 의무 등이 나타납니다. 교인의 의무는 한마디로 목사에 의한 교인 지배와 억제를 정당화하는 노예제도와 같다고 봅니다. 한국 교회의 많은 성도가 이러한 사실을 거의 모르고 있다는 것이 인간적으로 너무 개탄스럽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듭니다. 아무리 목사 중심의 헌법을 비판한다고 해도 성경적 대안을 찾지 못한다면 성도들은 다시 인간의 제도 속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답답한 마음도 더 커집니다.
Y연구생 3조에 보면 교인의 권리라고 밝히고 있지만, 목사가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헌법 결론에 다다를수록 목사들이 헌법을 준수해야 하는 성도를 ‘그리스도의 몸 된 지체’로 보기는 정말로 어렵겠다는 생각이 몰려옵니다. ‘오직 성경’을 사수하며 500년 전통을 이어오는 한국 장로교 헌법이 이렇게 끝나고 있다는 사실이 매우 슬픕니다. 주일 예배를 위해서는 매매(賣買) 행위를 금지한다는 조항도 나오는데 현재 한국 교회는 거의 무시하는 쓸모없는 사문화(死文化)된 조항이라고 봅니다. 일요일만 특정해서 특별한 형식과 제도를 만드는 것 자체가 중세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하는 반(反)개혁적 행태입니다. ‘학습 서약’을 억지로 하게 한다든지 6개월 출석, 만 2세 유아세례 조항은 그야말로 성경에 없는 인위적 관습입니다. 학습 서약문을 억지로 받는다고 신앙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목사가 판단할 수 있는 사항도 아닙니다. 성례에서 성찬에 쓰고 남은 떡과 포도즙은 묻거나 불태운다는 조항은 거의 미신적입니다. 공로 기념비나 동상을 세우지 말라고 하는데 곳곳에 그 흔적들이 즐비합니다. 자신들도 지키지 않은 조항들을 성도들에게는 요구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입니다. 이런 독소 조항으로 만들어진 헌법적 규칙을 교회 헌법이라며 성경의 권위보다 위에 두고 교회를 치리해가고 있는 이 집단들이야말로 정말로 불법을 저지르는 자들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교인의 의무’ 조항은
성경이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해서 하라고 했으므로
사명만 있을 뿐이다!
J연구생 그뿐만 아니라 교회 일을 선거하거나 투표해서 다수결로 정하는 일 역시 세속적인 인위적 제도의 전형이라고 생각합니다. 선거운동을 하지 말라고 하지만 대부분 선거운동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위해 노골적으로 선거운동을 합니다. 성경 말씀의 운동력(히 4:12)은 ‘교훈과 책망과 의로 교육하기’(딤후 3:16)에 충분한 권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몸 된 교회에서 선거와 투표를 통해 다수결로 의사를 결정하는 것은 교회가 극단적인 인본주의로 흘러가는 대표적인 불법 행사로 보입니다. 그런데 선거와 투표 역시 목사의 권한 아래 있어서 당회가 허락하지 않으면 성사될 수 없습니다. 집사, 장로, 권찰(勸察) 조항도 목사의 목회를 정당화하기 위한 제도들입니다. 혼상례, 재혼 조항은 모두 성경과는 무관합니다. 이러한 의식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에 대한 귀중한 가치를 서로서로 존중하는 것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여러분의 다양한 비판을 듣고 보니 목회에 전념했던 목사의 한 사람으로, 신앙 선배의 한 사람으로서 큰 부끄러움이 몰려옵니다. 그 누구보다 성경적인 올바른 기독교 진리가 무엇인지 강조하면서 살았는데, 막상 40여 년 목회 활동 과정은 한국 교회 동료 목사들의 행태를 스스로는 묵과하면서 살아오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까지 몰려옵니다. 정말로 지금이라도 여러분들과 함께, 그리고 이 지면을 통해 꼭 짚고 싶었던 ‘장로교 헌법’을 세밀하게 살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조금 전 기자님께서 진단했듯이 우리가 지금 하는 비판은 한국 교회 파괴가 목적이 아니라,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한 성경진리 중심의 한국 교회 개혁이 목적임을 다시 강조하고자 합니다. 저도 헌법적 규칙에 대해 조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사실 앞에서 P연구생이 ‘교인의 의무’ 조항에 대해 언급했지만, 성경에는 의무가 아니라,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하여서 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안수기도’ 조항이 헌법적 규칙 12조에 등장합니다. 목사의 특권 중의 특권이 바로 축도권, 안수기도권입니다. 장로에게도 집사 장립이나 환자 교인에게는 허락하지만, 장로의 안수권 자체는 목사가 허락하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일반 성도와 목사를 구별하는 결정적 증거가 바로 이 안수기도권, 축도권, 축복권입니다. 성경적 근거가 없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신학교에 수천만 원의 등록금을 지불하는 이유도 결국 이 특별하지만 비성경적인 ‘축도권’을 취득하기 위한 것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헌법적 규칙이 목사의 교회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한 인위적 제도라고 본다면, 축도권 독점은 목사들의 교인 지배와 목회 성공을 위해 너무도 당연한 것입니다. 일찍이 저는 안수기도의 허구를 신학적으로 큰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을 들고 성도들을 억누르는 자세로 하지는 않았지만, 목회 과정에서 목사라는 이름으로 행했던 축도와 안수기도는 부끄러운 부분이었음을 다시 상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헌법적 규칙은 마지막에 규칙의 개정이나 첨가, 삭제는 총회의 결의로 가능하다고 합니다. 이 말은 헌법적 규칙이 성경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제도임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헌법적 규칙’은
교인들의 신앙생활 전부를
목사에게 종속시키고 있으므로
비성경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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