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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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1-12-22 10:2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무엇이 될래 보다 어떻게 살래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빌 4:11~12)


나는 여러 해 전에 영국 기자로서 한국에 와서 언론 활동을 10년 넘게 하고 있는 다니엘 튜더 씨가 쓴 ‘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란 책을 읽으면서 제목 그대로를 공감했던 일이 있다. 저자는 그의 책에서 “한국인은 물질적 성공과 안정에도 불구하고 진실된 만족감을 크게 잃어가고 있다. 한국은 교육, 명예, 외모, 직업적 성취에서 스스로를 불가능한 기준에 획일적으로 맞추도록 너무 큰 압박을 가하는 나라”라고 지적해 주고 있다.

나는 이 저자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다. 우리는 6~70년 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하고 불안했던 나라가 하나님의 축복으로 한강의 기적을 이룬 나라임에 틀림이 없다. 그런데도 한국인은 만족하지도 않고 행복해하지도 않고 있다. 그 증거로 벌써 10년 넘게 세계에서 자살 1등 국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최근 국민일보에서 지용근 씨가(목회데이터연구소 대표) 자살 문제에 대한 글을 실었는데 ‘돈, 행복, 명예에 이끌려 가는 한국인’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쓴 것을 보았다.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에서도 가장 높다. 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가 OECD국가들의 평균이 11명인 데 비해 한국은 24명으로 평균 2.2배에 달할 정도로 자살률이 높다.
특히 우리나라의 자살률 특징 중 하나가 젊은 사람들의 자살률이 높다는 점이다. 우리 국민의 사망 원인 전체 1위는 단연 ‘암’이다. 그런데 10~30대까지 젊은이들의 사망원인 1위는 자살이다. 특히 20대의 경우 사망자의 54%가 자살이다. 참으로 충격적인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독립투사요 애국자인 백범 김구 선생은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부력은 우리의 생활이 빈곤하지 않고 살만하면 족하다”라고 말하면서 “한국이 자국민과 외국인에게 행복을 주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의 글 제목대로 ‘무엇이 될래 보다 어떻게 살래’를 더 중요시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생은 doing보다 being을 중시해야 하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한국 기독교는 기복 신앙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안타깝게 생각한다.

이제 한국교회는 무엇이 될래 보다 어떻게 살래를 더 중요한 가치로 먼저 크리스천 된 우리들의 삶의 자세를 바로 고쳐나가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사도바울의 삶의 자세를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빌립보서 4장 11~12절에서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씀하면서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로 강조하고 있다. 자족의 삶이 저절로 오는 것이 아니라 자족의 삶을 말씀을 통해 훈련하고 배워야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무엇이 될래를 어떻게 살래로 바꾸어 나가도록 먼저 크리스천 된 우리가 깨닫고 본을 보여야 한다. 우리가 경제대국이 되고 선진국이면 무엇하겠는가. 세계에서 자살 대국이요 저출산 1등 국가임을 마음 아프게 느끼고 부끄럽게 생각해야 된다.  대통령이 되고 시장이 되어도 자살하는 나라가 행복한 나라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물질의 만족은 끝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이 떡으로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지 않은가. 바로 현재 내가 살고 있는 삶에서 자족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행복이요 축복임을 알아야 한다.
오늘의 정치가들도 국민을 향해 끝도 없는 물질 만족만을 추구하는 정책보다 우리 민족이 자족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에 우선 정책을 세워 나가는 지도자를 바로 세워야 한다.
무엇이 될래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며 행복하게 사는 것인지를 한국교회가 이 사회를 향해 본을 보여 주어야 할 사명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아멘.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진호 목사 (기감 전감독회장 / 도봉교회 원로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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