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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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1-11 20:4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가정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예수는 마리아와 요셉의 충실한 아들로 성장하였고, 유대교 가정의 이상에 충실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아버지 요셉이 일찍 세상을 떠난 뒤 홀로 가계를 꾸리신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하면서 효성을 다했다. 그리고 그의 때가 가까이 왔을 때 예수는 가정을 떠나 하나님 나라의 복음전파에 전적으로 헌신하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가나의 혼인잔치에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예수의 모습을 우리들에게 알려주고 있다. 혼인잔치 도중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포도주가 떨어진 사실을 예수에게 알린다. 예수는 마리아에게 말한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 2:4). 예수가 생모인 마리아에게 “여자여”(Υύναι, woman)라고 호칭한 것은 예수의 독특한 자아의식을 드러내는 호칭이다. 혈연관계를 넘어서서 공적 사역의 관계를 함축하고 있다. 예수는 공적 사역의 때에는 생모(生母)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와 당신 사이에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내 때”(ἡ ὥρα, my hour)란 십자가에 달리는 죽음의 때요 동시에 예수가 영화롭게 되는 때이다. 이 때는 아직도 기다려야 하는 때이다. 그러나 이 때는 그가 물을 포도주로 바꾸는 표적을 통하여 이미 지금 현재적 사건이 된다. 포도주는 예수께서 신자들에게 선사하시는 생명 또는 성령을 지시한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 7:37-39). 예수께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킨 가나의 표적은 앞으로 다가오는 공적 생애에서 행하실 예수의 메시아적 사역을 예표하는 것이다.

I. 가정은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거룩한 처소

예수는 가정을 신성하게 보았다. 예수는 가정을 하나님의 뜻이 나타나는 거룩한 처소로 믿었다. 예수께서는 구약 창세기 2장의 인간 창조 구절(창 2:21-25)을 인용하시면서 해석하신다: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시고,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 그런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마 19:4-6). 결혼은 창조주의 섭리이며, 한 몸이 되는 신비이다. 결혼은 남자와 여자 두 사람이 맺어지는 것이지만 여기에는 창조주의 섭리가 있다. 창세기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혼자 사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시고 그에게 반려자로서 하와를 주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하나님은 장성한 남자와 여자가 부모에게서 독립하여 둘이 하나의 몸을 이룰 것을 말씀하신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이것이 가정의 신비이다. 그러므로 동성혼은 창조의 섭리에 위배된다. 남성과 여성의 결혼 테두리 안에서 하나님이 제정하신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한 창조 원리란 남성과 여성 사이의 성관계, 남성과 여성의 상호 보완성, 결혼을 통한 남성과 여성의 한 몸과 가정 형성, 남성과 여성에 의한 자녀 생산이다. 동성애와 동성혼은 하나님의 이러한 창조 질서에 위배된다. 예수는 이러한 창세기에 나타난 가정의 신비 사상을 그대로 수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혼이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인위적으로 나누어서는 안 된다. 예수는 이혼을 허락한 모세의 의도를 설명하시면서 본래 하나님의 뜻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모세가 너희 마음의 완악함 때문에 아내 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마 19:8). 그리고 음행한 사유 없는 이혼은 허용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외에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드는 자는 간음함이니라”(마 19:9).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나아와 그를 시험하여 질문한다: “사람이 어떤 이유가 있으면 그 아내를 버리는 것이 옳으니이까”(마 19:3).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음행한 이유 없이 아내를 버리면 이는 그로 간음하게 함이요 또 누구든지 버림받은 여자에게 장가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마 5:32). 음행의 경우 음행한 자가 이미 한 몸이 된 결혼의 신성함을 훼손하고 깨뜨렸기 때문에 예수는 음행의 경우만 이혼을 허락하신 것이다.

II. 가정은 작은 하나님의 나라

예수는 “아버지는 가정의 제사장”이라는 신명기의 가르침을 계승하고 있다. 신명기에서 모세는 다음같이 가르친다: “너와 네 자녀와 노비와 네 성중에 있는 레위인과 및 너희 중에 있는 객과 고아와 과부가 함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지니라”(신 16:11).

누가가 그의 복음서(눅 15장)에서 기록한 돌아온 탕자(蕩子)를 받아주시는 아버지 이야기는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가정에 관한 설교(눅 15:11)이다. 이 비유가 담고 있는 내용은 인류 역사상 시대를 초월하여 어느 가정에나 있을 수 있는 평범한 사건이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遺産)을 받아서 타국에 가서 허랑방탕하여 다 탕진(蕩盡)한 후에 흉년이 들어 궁핍한 나머지 돼지지기로 들어간다. 둘째 아들은 굶주림에 시달리다가 문득 정신이 들어 스스로 돌이켜 이른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눅 15:17). 타국에서 멸시받고 굶주리는 고생을 한 탕자는 겸허해져 이제 자신을 아버지의 품꾼 하나로 생각하고 집으로 되돌아간다. 아버지는 대문을 열어 놓고 오늘도 아들을 기다린다. 그러나 집 나간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은 아들이 생각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보고 “아직도 거리가 먼데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춘다”(눅 15:20). 아들은 아버지에게 다가가 잘못을 고백한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눅 15:21). 그런데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른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 15:22-24). 그리하여 온 가족들이 잔치를 열고 즐거워한다. 그런데 맏아들이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종에게 그 이유를 묻는다. 맏아들인 형은 집 나간 동생이 돌아와 잔치를 베푸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는다. 이에 형은 노하여 잔치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하나, 아버지는 나와서 맏아들에게 그 이유를 알린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눅 15:32).

인간 가정은 하나님 나라의 축소판이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서 탕자 아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용서하시는 아버지의 사랑이 바로 하늘에 계시는 아버지의 사랑인 것을 비유로 설명하고 계신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 / 숭실대 명예교수)

‘한국기독교지도자협의회’ 신임 대표회장 김동권 목사 대담
“크리스천 영성과 리더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