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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3-09-13 14:1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상해 ‘인성학교’와 민족 교육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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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으로 상해는 한국의 근대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다. 현재 상해에는 4~5만 명의 조선족과 4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다. 일제하 상해 임정 시기에 설립된 인성학교는 민족 교육의 요람이었다. 김규식, 김두봉, 안창호, 여운형, 손정도, 김태연 등 교장과 대부분의 교원은 임시정부와 관련된 독립운동가들이었다. 필자는 일제 강점기에 유일한 민족 교육의 산실인 상해 인성학교를 통해 교육이, 민족의 애국 계몽 운동이 독립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살피고자 한다.

이를 위해 먼저 일제하의 조선 총독부 식민지 교육 정책을 서술하고 인성학교의 설립과 임정의 교육 방침과 정책, 인성학교의 교육 이념과 교과 내용, 학제 등 인성학교의 성격을 살피고자 한다. 식민지 교육 정책을 통해 당시 일본의 교육에 대한 탄압 정책을 알 수 있다. 통감부의 교육 정책은 우민화 정책인데, 5가지 방법이 시행되었다. 즉 일제는 1892년에 공포된 ‘소 학교령’의 취학연수 6년을 초등교육 4년으로 단축하는 이른바 ‘보통 교육령’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중등 학교령’만을 공포하여 고등학교의 설치는 인정하지 않았다. 두 번째는 동화정책의 일환으로 관·공립학교 보통학교의 확장이다. 1906년부터 1908년 사이에 관립학교 9개교, 공립학교 50개교의 보통학교가 설치되었다. 세 번째는 일본어의 보급이다. 보통학교와 고등학교에서 일본어를 일주일에 6시간 가르쳤다. 네 번째는 친일교육의 강화이다. 교과서를 통해 일본어뿐만 아니라, 일본 역사까지 교육시켰다. 다섯 번째는 일본인 교직원의 등용을 추진한 것이다.

이러한 시도는 식민지 교육의 준비단계로 일본으로 동화를 시도하는 일제의 교육 정책이었다. 일제는 민족말살과 탄압 정책으로 구체적인 법령을 제정하였다. 1905년부터 1910년 이른바 ‘한·일 합방’ 직전까지, “내정개혁, 시정개선”의 구실 아래 법령 정비를 단행해 나갔다. 특히 1908년 ‘사립 학교령’(칙령 제62호)은 민족교육과 기독교 탄압을 전제로 한 우민화 교육 정책의 근간이 되었다. 이어서 총독부는 한·일 합방 직후에 1911년 8월 제1차 ‘조선 교육령’(칙령 제229호)과 연이어 10월에는 ‘사립 학교 규칙’(총독부령 114호)을 계속 공포하였다. 이것은 치외법권을 누리고 있던 선교사가 설립하여 운영하는 기독교 학교에 대한 탄압과 기독교와 연결된 서구 세력을 배제하고 한국을 완전히 일본에 동화시키려는 일제의 의지였음을 엿볼 수 있다. 더욱이 1915년 3월에 총독부가 ‘사립학교 규칙’을 대폭 개정하여 ‘개정 사립학교 규칙’(총독부령 제24호)을 공포하면서, ‘종교와 교육 간의 단절 정책’을 기독교 탄압 정책의 일환으로 삼아 모든 기독교 학교에 적용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모든 학교의 교수 과목에서 성경을 제외할 것과 5년 내에 교사들에게 일본어 학습을 의무화하고, 고등 보통 학교의 교명 변경을 강요하는 내용이었다. 이 ‘개정 사립 학교규칙’에 대해 조선 선교연합회(Federal Council of Missions)는, 개정 사립학교규칙이 종교교육의 자유를 침해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종교교육의 자유를 인정해 달라는 내용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총독부의 지속적인 기독교 탄압은 1915년 8월 ‘포교규칙’(총독부령 제83호)의 공포로 노골화되었다. 이 법안의 핵심은 종교 공인 정책이었다. 종교의 범위도 본령에서 “종교라 함은 신도(神道)·불도(佛道) 및 기독교를 일컫는다”(제1보)라고 하여 세 종교 이외의 종교들은 유사종교로 분류되었다. 포교규칙은 강력한 종교 규제법령으로서 칙령에 해당되는 총독부령으로 공포되었다. 이것은 과거 사찰령이 제령으로 학원 규정이 훈령으로 발표된 것과 비교하면, 사실상 기독교 규제 법령인 포교 규칙은 높은 강도로 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제는 식민지 동화정책에 가장 큰 걸림돌이 기독교임을 인식하고 ‘개정 조선 교육령’·‘포교규칙’·‘조선심득’(敎育心得) 등 법률을 제정하고, 간접적인 방법으로 기독교를 규제하려 하였다. 하지만 위의 법령들이 기독교 탄압의 악법임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다.

1916년 1월에 발표된 ‘교육심득’에서도 “제국 교육의 본지는 일찍이 교육에 관한 칙어에서 명시한 바로서, 내지인이나 조선인을 막론하고 다 같이 성로(星盧)에 입각하여 충량한 국민을 양성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하였다. 그들은 공공연하게 “조선인은 자연에 돌아가 일체의 구사상과 민족성을 포기하고 조선의 국토와 백성을 일본화(日本化)할 각오가 있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당시 일제의 끈질긴 동화정책은 1920년대에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어휘를 사용하여 우리 민족을 동화시키려는 의도를 감추지 않았으며 성국신민화교육(星國臣民化敎育)을 통해 민족 말살 정책을 강행하였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일제하 특히 1910년대 일제의 강경한 식민지 정책과 민족 말살의 탄압적인 교육 정책은 반일 감정을 격화시키고, 이러한 시대에 교회는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 글은 필자가 『기독교와 어문학』에 게재한 논문을 편집하여 투고하는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Knox Kwon (신앙과 사회문화연구소 소장, 총신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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