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나사렛 예수(Ⅱ)
IV. 메시아의 비밀:
대중영합주의(populism) 거부
예수는 제자들에게 자기가 메시아라는 사실을 공표(公表)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신다: “이에 제자들에게 경고하사 자기가 그리스도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라”(마 16:20). 예수의 이러한 말씀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해석하는 것처럼 메시아 의식의 부재(不在)로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19세기 독일 자유주의 신학자 브레데(William Wrede)는 예수는 메시아가 아니었고 메시아 의식도 없었는데 메시아로 만들기 위해서 마가가 “메시아 비밀(messianic secret)”이라는 것을 창안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역사적 예수의 모습과 상충된다. 브레데는 별세 전에 아돌프 하르낙에게 보낸 개인 서신에서 자신의 메시아 비밀 관점을 포기했다.
메시아 비밀이란 브레데가 주장하는 것처럼 마가의 창안이 아니라, 역사적 예수가 주체적으로 가지신 자기 정체성 이해였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그가 메시아임을 드러내지 말라고 하신 것은 다음 두 가지 이유로 볼 수 있다.
첫째는 그가 로마에 반역하는 정치적 선동가로 오해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BC 2세기 마카비 형제들(The Maccabee, Judas, Jonathan, Semeon)이 헬라의 셀류커스 가(家)(안티오커스 에피파네스 4세)에 대해 반란을 일으켜 무력에 의한 하스모니아 왕국을 설립한 사건을 아마도 예수는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마카비 형제들은 열심당원과 지지하는 유대인들에 의하여 메시아로 추앙되었다. 그리고 다음 세기 135년의 유월절과 오순절 사이에 로마에 대항한 바르 코크바(Bar Kokhba) 반란 시에는 시므온 바르 코크바(Simeon Bar Kokhba)는 랍비 아키바 벤 요셉(A.D. 50-135)에 의해 ‘메시아’로 떠받들어졌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 예수가 행하신 5병2어 기적을 보고 그를 왕으로 만들려는 군중들로부터 도피하는 예수의 이해되기 어려운 행동을 기술하고 있다: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요 6:14-15). 예수의 도피 행동은 브레다 등 자유주의자들이 해석하는 바같이 예수가 메시아 의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자신의 메시아 사명이 고난의 종으로서 대중들이 기대하는 정치적 메시아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자신이 정치적 혁명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시고 계셨다. 메시아 사실의 공개는 군중들이 오해하여 고난의 종인 예수에게 엉뚱한 희망을 걸도록 오도할 수 있고, 그렇게 하여 정치적 재판으로 이끌어 가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메시아는 거짓 지도자들의 포퓰리즘(populism)에 빠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예수의 행동은 잘 보여주고 있다.
둘째, 예수의 메시아 이해는 고난의 종이었다.
예수 자신이 이해하는 메시아 사명은 고난의 종으로서 군중들이 바라는 영광의 메시아상과 달랐다. 예수는 복음사역 시작 시부터 명료한 메시아 의식을 가졌다. 예수의 초기 산상설교에서 그의 메시지는 모세나 선지자를 넘어섰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 5:17). 그는 하나님을 아버지, 자신을 아들이라고 하였고,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였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
그러나 예수가 이해한 메시아상은 그 시대에 편만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는 군중적 메시아상과는 전혀 달랐다. 예수는 자신을 고난의 종인 메시아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란 군중들을 선동하여 자신을 따르도록 하는 영광의 길이 아니라,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하나님의 길이 아닌 것처럼 보여서, 세상 사람들은 피하고자 하는 고난과 고통의 길을 통해서 실현되는 것으로 보았다. 메시아의 비밀과 십자가의 길은 연결되어 있다. 메시아는 일반 군중들이 바라는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세속의 눈으로 보기에는 수치스럽고 보잘것없는 모습으로 오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참하나님이 우리들에게 그의 구원을 주시는 겸허한 모습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구속의 경륜이요, 오묘(奧妙)이다.
V. 고난의 종으로서의 메시아
예수는 베드로의 고백을 듣고 비로소 제자들에게 자신이 고난의 종이라는 사실을 알린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3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마 16:21). 예수는 자신이 메시아인데 그의 메시아 사명은 예루살렘에 올라가 종교지도자들에 의하여 고난과 거절과 죽음을 당하고 사흘 후에 부활하는 고난의 종 되심을 제자들에게 알리신다.
복음서 저자 누가는 인자(人子, the Son of Man)의 날과 관련하여 인자가 영광 속에 나타날 것을 시사(示唆)한다: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이어 하늘 아래 저쪽까지 비침같이 인자도 자기 날에 그러하리라”(눅 17:24). 인자의 날이란 그가 하나님의 영광을 지니고 천사들과 같이 재림하실 때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전(前)에 인자는 먼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서 죽어 이 세대로부터 버림받아야 할 것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그가 먼저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 바 되어야 할지니라”(눅 17:25). 복음서 저자 마가는 예수께서 인자의 고난 사상을 이미 구약성경 읽기를 통하여 알게 되신 것을 시사하고 있다: “이르시되 엘리야가 과연 먼저 와서 모든 것을 회복하거니와 어찌 인자에 대하여 기록하기를 많은 고난을 받고 멸시를 당하리라 하였느냐.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막 9:12-13). 세례자 요한의 모습으로 재림한 엘리야도 결국에 예수의 길을 증명해야 했다. 세례자 요한은 이 고난과 죽음의 길을 예수에 앞서 걸어감으로써 예수의 고난의 길을 닦았다. 구약의 구절들: “건축자가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는 여호와께서 행하신 것이요 우리 눈에 기이한 바로다”(시 118:22-23), “나를 보는 자는 다 나를 비웃으며 입술을 비쭉거리고 머리를 흔들며 말하되”(시 22:7) 등은 십자가 신학적으로 읽을 때 고난받는 종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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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 / 숭실대 명예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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