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7-09-28 19:29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가 본 언어: 이해는 바로 오해다!


“우리는 처음부터 비논리적인, 공정하지 않은 존재이며, 우리가 이렇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 삶의 가장 크고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부조화 중의 하나다.”(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I 32: KGW IV 2, 48쪽)  철학자 니체에 대한 많은 수식어를 붙일 수 있다. 신 죽음의 폭로자, 허무주의자, 모순과 역설의 철학자, 영원회귀의 철학자, 권력의지의 철학자, 예술가 철학자 등등, 그런데 다양성을 사상의 본성으로 삼는 현대철학에서 언어에 대한 근본 비판을 제기하면서 언어는 진리를 결코 담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 언어철학자  니체에 대해서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 있다.
앞의 인용에는 니체의 언어관이 잘 나타나 있다. 인간은 처음부터 비논리적이다. 비논리적이라는 말은 개념의 발생부터 논증 단계까지 일관성이 유지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논리를 간단하게 정의하면 ‘진리를 위한 논증의 절차와 형식’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참임을 주장하는 명제에 대해 그 명제를 뒷받침되는 또 다른 참인 명제를 근거로 제시하고 그 논증과정이 오류가 없을 때 참 혹은 진리라고 판정한다. 가령 ‘사랑은 타인을 좋아하는 감정이다. 좋아하는 감정은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상대방을 더 깊이 이해하려는 마음가짐으로 드러날 수밖에 없다.’ 이른바 삼단논법이다. 명제 세 개가 세 단계에서 연결성을 유지하면서 결국 세 번째 주장을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인식의 과정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가령 ‘사랑은 타인을 좋아하는 감정이다’는 명제에서, 사랑이라는 말부터 분명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사랑은 경험하는 모든 사람의 경우마다 특수한 상황 때문에 일치하지 않는다. 그런데 언어 생활에서 보면 마치 ‘사랑’을 알고 있는 듯, 객관적인 사랑이 있는 듯이 의사소통을 한다. 이야기를 조금만 더 하면 ‘사랑’의 의미는 서로에게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니체는 바로 이 부분을 지적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에게 ‘사랑’의 의미는 모두 다르다. 하지만 사전(事典)에 누군가가 기록하여 올려놓은 뜻을 마치 사실이나 진리처럼 따른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사전의 뜻과 서로 차이가 날 때 일반적으로 한쪽은 ‘틀렸다’(거짓)고 하고 다른 한쪽은 ‘맞았다’(참)고 평가한다. 앞에서 든 예의 다른 개념도 마찬가지다. ‘타인을 깊이 이해하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이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개념을 가지고 말이나 글로 개인의 생각과 의도를 표현할 때 이른바 ‘합리적인 의사소통의 절차’가 생기면 진리에 대한 ‘합의(合意)’에 도달했다고 말한다. 니체는 합리적 의사절차를 통해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을 원천적으로 믿지 않는다. 니체의 이 말은 우리도 금방 알 수 있다. 같이 말하면서 서로 이야기가 통했다고 하지만 곧이어 얼마나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고, 함께 악수하고 합의에 도달했던 상대방을 이내 매도하고 거짓말하고 있다고 몰아세우는 것을 보게 된다. 니체의 지적을 따라가 본다면, 한마디로, 언어를 통해 진리에 도달하는 모든 행위는 언어의 함정을 파는 것이며, 있지도 않은 진리에 대한 맹신이고, 나아가 이해의 과정은 다름 아닌 거듭되는 ‘오해’의 과정일 뿐이다. 니체는 이렇게 말한다. “이해는 놀라울 정도로 빨리 따라오는 상상작용과 추론작용이다. 무엇이 진짜로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가 본 것에 의해서는 사실 뭐라 말하기가 어렵다. - 왜냐하면 어떤 것을 보면서 우리는 꾸며내고 추론하기 때문이다.”(프리드리히 니체, 『유고』 KGW V 2 11[13], 344쪽)
니체의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서양은 근대를 통해 많은 학문과 기술 발전을 이룩했다. 칸트의 말처럼 금방 이 세상에 ‘도덕의 왕국’이 임하고 모든 인류가 영원한 평화를 실현하면서 살 수 있는 듯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현대는 이러한 서구의 희망이 절망으로 바뀐 시대가 되었다. 니체의 말처럼 ‘진짜 무엇이 발생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 채 서양 근대는 지식의 정교함과 과학 기술의 위대한 발견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기독교를 문화적 배경으로 삼았던 서양은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 혹은 ‘하늘나라’를 발전하는 유럽 국가들과  일치시키기도 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그야말로 상상의 산물이었고 착각이었으며 오만한 판단이었음을 유럽인 스스로 드러냈다.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민족끼리 혹은 민족 내에서 벌어진 전쟁과 폭동과 혁명으로 수천만 명의 무고한 희생을 낳고 말았다. 어디 서구뿐인가? 니체가 죽었던 해(1900년)로부터 시작하는 20세기 현대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인간에 대한 폭력과 살상의 시대였다. 언어가 부족해서도 아니며 진리에 대한 담론이 적어서도 아니었다. 실상은 수많은 말들이 다름 아닌 언어 조작과 허구의 ‘바벨탑’이었다.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은 애초부터 허구였다. 불변의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은 인간 자신이 조작해 낸 것을 마치 실재하는 진리인 양 숭배하다가 망한 꼴이다. 니체의 말대로 자기가 꾸며놓고 마치 진리에 도달하는 듯 거짓에 거짓을 더하고 오해에 오해를 추가한 셈이다. 이것이 언어활동의 본질이며 근본상황이다. 시작하는 첫 문장에서 니체가 말했듯이 인간은 결코 ‘공정하지 않은 존재’다. 노력하면 불공정을 극복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근본부터 공정할 수 없는 존재다. 왜냐하면, 언어를 통해 인간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점점 ‘오해’하게 되며, 추론과 의사소통을 통해 진리 합의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더 많은 거짓을 꾸며 내야 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간 언어에 대한 본질적 불신을 지적하는 니체는 언어생활에서 겸손과 정직을 요구한다. 맞는 요구다. 하지만 니체 자신도 그 요구가 실현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니체 이후 현대는 의사소통을 강조하지만, 의사소통의 원천부터 해결할 수 없는 언어 사용의 근본 문제를 가지고 있다. 객관적 진리도 없으며 있다고 하더라도 언어를 통해서는 그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언어를 뛰어넘는 어떤 소통의 장치를 다시 고안한다고 하더라도 본질적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진짜와 가짜의 경계가 사라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한 세기 전 언어의 맹점을 지적한 니체의 지적을 보면서, 신앙인으로 살고 있는 나의 기억 속에 아직도 떠나지 않고 있는 객관적이며 절대적인 진리에 대한 확신과 소망을 사도 바울의 권고와 함께 이 시대의 가장 신비한 사건으로 대하게 된다.       

5 이제 인내와 안위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6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
(롬 15:5~6).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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