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순간을 영원처럼 살라’는 망령(妄靈)의 속임수 !
유대인 철학자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는 ‘순간’(instant, 내면에 in 선다stare)’ 개념을 인간의 정체성과 직결시킨다. 이른바 생각하는 주체로서 인간은 ‘자신의 내면에서(=순간적으로) 성립한다.’ 내면성이라는 공간과 찰나(刹那)의 시간성이 생각하는 주체인 자아(自我)의 성립배경이다. 하지만 내면성이 어떤 물질적 공간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찰나도 시간으로 환산(換算)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순간(instant)과 관련된 공간과 시간 개념은 추상적이며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특성을 지닌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순간’ 개념을 주체의 자기 정립과 관련해서 일반적으로 부정적 뜻을 지닌 ‘피로(疲勞)’를 새롭게 해석하는데 사용한다. 무기력의 원인이 되는 피로는 노동과 수고의 결과다. 그런데 피로에 의한 무기력함은 노동의 마침과 ‘쉼’을 간직하고 있는 정지 상태이기도 하다. 노동의 결과와 새로운 노동이 다시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한다.
이러한 뜻에서 레비나스는 피로 상태를 의지의 나약함이나 무력감(無力感)으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삶의 의미 나아가 인간 존재의 궁극적 의미를 캐묻고자 하는 운명적 시도를 스스로 잠시 휴식의 상태로 보류한 사건이 피로라고 한다. 수동적으로 밀려난 사건이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 보거나 거부해 보는 방식이다. 적극적 행위와 생산성을 목표로 하는 관점에서 보면 피로는 삶의 의지의 약화이며 부정적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무언의 방식으로 삶에 대처하는 적극적인 거절 행동도 된다.
이렇게 피로는 노동과 생산의 의무에 대한 적극적 불이행과 도피의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존재 의미 추구의 한 방식이다. 이 피로는 임의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존재 의미를 물어야 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마주치게 되는 불가피한 삶의 요소가 된다. 이렇게 불가피한 삶의 요소라는 점에서 레비나스는 피로와 무기력 상황을 “형성되어 가고 있는 행위에 내재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래서 소유하지 않으려고 적극적으로 거절하는 방식을 취함으로써 피로는 존재 의미에 대한 숙고과정을 통해 오히려 삶에 대한 강한 욕구를 유지하는 경우라고도 할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 피로의 순간이 없는 존재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순간이란 주체의 내면에서 반드시 겪어야 하는 멈춤과 물러남의 필연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존재라는 거대한 짐이 몰려오는 상황에서 그것을 저지하고 정지시키려는 저항의 극대화이기도 한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 격전을 치르는 과정이다.
피로는 존재 의미를 추구하는 느슨해짐의 방식 자체일 뿐이지 그 무엇의 수단적 계기로 보아서는 안 된다. 예를 들면 잠을 자야하는 이유로 피곤이라고 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잠자는 것은 이미 피로 자체에서 벗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피로는 수고의 순간이 갖는 의미가 중요하다. 수고의 경우인 노동은 생산 활동과 열정의 소모라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삶을 위한 도약이기도 하지만 생산물 앞에서 겪는 박탈과 소외와 절망이기도 하다. 레비나스는 이러한 수고와 노동의 사건을 “정복이자 속박”이라고 한다.
레비나스는 피로의 사건에서 변증법적 긴장과 갈등을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는 관계를 통한 존재를 주장하기 때문이다. 수고와 피로에서 동시에 겪는 극단의 경험이 없이는 존재 이해는 의미가 없다. 이러한 생각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레비나스는 존재론보다 윤리학이 앞선다고 말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이렇게 말한다. “수고는 영원성(무시간적인 현재 순간의 영원성)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하나의 불가능성이다.” 즉 피로와 수고의 찰나에 영원성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순간을 영원처럼 살 수 있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태도는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찬탈하고자 했던 인류의 시조와 그 후손의 극복할 수 없는 근본 정황(죄성)이다. 의 혜안으로 의 순간을 헤아려 본다고 하더라도 그곳에는 준엄한 하나님의 심판밖에 보일 것이 없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의 열매를 따먹었으므로 땅이 너 때문에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 동안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을 것이다.
(창 3:17, 바른성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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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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