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고대 그리스 철학의 기원 2 : 피조물에서 창조주를 규정하려는 오만
남유다가 망해가던 무렵(주전 605-586년) 7세기 초부터 6세기 말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서양 철학의 토대가 마련되고 있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페니키아 출신의 밀레토스 사람인 탈레스였다. 그는 수학자이고 천문학자였으며 정치적 영향력도 있었다. 천문학에 대한 전문 지식은 주전 585년에 일어났던 일식(日蝕)을 예언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그는 ‘지혜자(sophos)’ 호칭을 받기도 했다. 이 일화를 볼 때 서양 철학은 수학과 천문학 즉 인간의 합리적 추론과 경험적 예측이 만들어낸 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지난 호에서 이미 살핀 것처럼 그리스 철학 내지 이오니아 사상은 독자적인 것이 아니라 동방 즉 바벨론제국과 페르시아제국 문화가 지중해 스타일로 혼합한 것이다. 그는 세상 전체를 가능한 한 간단하게 규정하고자 했으며 만물의 근원에 대해 ‘물’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근대적 개념으로 표현하면 물질에 대한 자연과학적 가설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이러한 주전 7-6세기 지중해 동쪽 밀레토스에서 시작한 만물의 근원을 물질로 규정하고 그 물질의 변화가 세계의 변화와 운동을 가능하게 한다는 자연과학적 통찰을 “엄청난 자유와 대담성”의 표출이었다고 평가한다.
과도한 단순화일지 몰라도 어쨌든 서양 문화는 이후 자연과학적 기술과 유물론 중심의 사상으로 전개되고 지금까지 과학기술 문명의 유익과 폐해의 근본 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점은 이미 2천 7여 년 전에 예고된 바라고 할 수 있다. 서양을 중심으로 전개된 기독교의 전반적인 특성을 보더라도 자연과학적 사고방식이 지배적인 것도 우연이 아니다. 유물론으로 세계와 역사, 인간과 문화를 규정하고 그러한 사회 구조를 만들고자 했던 서양 근대와 현대의 시도는 탈레스의 후예임을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뿌리에서 자라는 뇌 구조 속에 성경에 나타난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담는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우리는 앞으로 니체의 서양 철학에 대한 통찰에서 왜 서양 철학 나아가 서양 기독교는 성경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었는지 그 원인 추적을 어느 정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탈레스에서 시작하는 유물론 중심의 서양 철학을 좀 더 따라가 보자. 탈레스는 자석의 인력을 보면서 물질에도 혼(魂)이 깃들고 무생물도 영혼이 참여하고 있다고 보았다.(267) 힘의 원리를 유물론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이러한 유물론적 사유 방식은 탈레스와 동향(同鄕)인 아낙시만드로스(Anaximandros, 주전 510-446)가 이 유물론을 더욱 발전시킨다. 밀레토스가 지배하는 식민지의 통치자이기도 했던 아낙시만드로스는 최초로 자연에 관한 기록을 남긴 인물이다. 그 이전까지 그리스인들에게 글을 쓰는 것은 비판의 대상이었으며 가치가 없는 헛된 일이었다. 위대한 스승이라면 글을 쓰지 않고 구전(口傳)으로 진리를 전수해야 했다. 하지만 아낙시만드로스에 오면 이 전통은 의미가 없어진다. 그는 지구의 자전, 천체, 지구와 대양의 면적을 나타내는 지도, 바벨론의 해시계 도입 등 그야말로 고대 자연과학의 기초 학문과 기술의 전수자였다.
그리고 그는 자연 만물을 대할 때 ‘근원’(아르케, arche/문헌학상 요 1:1에 이 단어가 ‘태초에’[en arche]로 등장함-철학과 신학의 아르케는 의미가 다르다. 이에 대해서는 상세한 논의가 필요함)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채택하여 만물의 근원을 ‘무한정자’(無限定者, apeiron)로 규정한다. 물질의 생성과 변화에 나타난 특성을 이 개념에 담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무한정자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무한정자는 모든 것을 포괄하며 모든 것을 조종한다. 그것은 죽지도 멸망하지도 않는다.”(272) 서양 철학의 근원은 ‘모든 것’ 즉 ‘세계’ 더 정확히 말하면 ‘세상의 만물’을 유물론 중심으로 담을 수 있는 개념 정립의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죽지도 않고 멸망하지도 않는다는 것은 신적 속성을 물질에 부여한 것이 아니라 물질의 무한 변화를 통한 다양한 형질 변화를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탈레스처럼 ‘근원은 물이다’는 긍정명제 방식이 아니라 아낙시만드로스는 ‘근원은 한정 혹은 한계를 지울 수 없는 것이다’는 부정명제 방식을 사용한다. 부정명제는 매우 안전한 개념 규정 방식이지만 그 뜻이 항상 애매하다. 그렇다면 아낙시만드로스의 ‘무한정자’는 단지 어떤 고정된 것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반영하는 개념이 된다. 항상 ‘무엇이 아니다’는 방식으로 말하는 것은 불변하는 어떤 것은 결코 존재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로 흘러가기 마련이다. ‘무한정자’를 전제하면 생성을 규정하기 위해 소멸이 반드시 필요하고, 소멸을 말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성을 전제해야만 한다. 생성은 소멸이 아니다. 소멸은 생성이 아니다. 그래서 생성과 소멸은 서로 대립하면서 세상을 움직이는 작동 원리가 된다. 그리고 세상은 대립과 갈등 구조이기 때문에 정의(正義)와 죄과(罪過)에 대한 처벌도 필요하다. 정의가 있기 때문에 죄과에 대한 처벌이 있고 동시에 처벌이 필요하기 때문에 반드시 정의는 존재해야 한다.
그런데 니체는 이러한 대립과 갈등 구조로 세상을 파악하는 아낙시만드로스의 사유 방식을 탈레스보다 우월한 통찰이라고 평가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는 자신이 구상하는 철학과 맥락을 같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니체가 고대 그리스 사상의 역사를 탐구하는 목적은 역동적인 예술 작품과 같은 고대인의 사유 방식을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관념과 개념 그리고 논리학으로 축소하거나 왜곡했다고 비판하기 위한 것이었다. 니체에게는 관념 중심의 철학으로 흘러가는 그리스 철학을 비판하기에 탈레스보다 아낙시만드로스가 더 유용하다. 니체가 고대 그리스 사상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개념으로 포착할 수 없지만 ‘천재 예술가의 직감과 같은 방식으로 감지할 수 있을 그 무엇에 대한 통찰 방식’이다. 피조물에서 창조주의 흔적을 감지하거나 확정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저주받은 피조물의 오만한 상상력이며 피조물의 자기 근원에 대한 망각이 빚은 비극이다.
기독교의 물질관에서 보면 이 세상에서 단지 물질로만 존재하는 것은 없다. 그것들은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그 통치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을 따르며 움직일 뿐이다. 물질의 모든 형질 변화는 창조주의 신적 통치 능력을 계시하는 일상적 증거로 보는 데서 이해의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다.
38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하니 39 무리 중 어떤 바리새인들이 말하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하거늘 40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마 19:38-40)
<205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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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배움을 사랑한 사람, 안회 |
서른둘. ‘오직 성경만’(Sola scriptura)의 권위에 도전하는 세력 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