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오피니언

 
작성일 : 23-06-13 13:20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국가와 정치에 대한 예수의 가르침 (II)


III.  예수 운동의 상징정치적 의미: 타이센의 사회사적 탐구


독일의 신약학자 게르드 타이센(Gerd Theißen)은 그의 논문 “예수와 그의 시대의 상징정치적 갈등”(Jesus und die symbolpolitischen Konflikte seiner Zeit)에서 사회사적 탐구를 통하여 예수 운동이 가진 상징정치적 의미를 드러내었다. 예수 시대의 특징이란 로마 지배권력층과 유대 민중 사이의 관계가 상징정치적 갈등(symbolpolitische Konflikte)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이다. 긴장들은 나중에 예루살렘의 함락이라는 폭력적인 갈등으로 바뀌었다.
이집트, 앗수르, 바빌론, 페르시아, 그리스 다음에 이제 로마가 팔레스타인을 지배하였다. 군사적으로 정치적으로 우월한 로마군의 지속적인 점령은 유대의 종교·사회·도덕적 상황을 로마에 대한 다양한 강한 적응과정과 분리과정으로 몰아간다. 이 과정은 유대의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규범과 기대 안정성을 해체한다. 로마 점령군들에 대한 유대 민중들의 극단적 거절과 기회주의의 긴장, 저항과 신체와 생명을 보유하려는 관심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상대주의 사고와 정치적인 무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유대 왕 헤롯 안티파스와 총독 빌라도는 갈릴리와 유대를 로마제국으로 편입시키고 유대인들의 유대전통에 대한 충성심을 약화하거나 제거하고자 시도했다. 헤롯은 유대의 수도를 예전에 묘지(墓地)였던 지역, 티베리아로 옮김으로써 유대교의 정결계명과의 갈등을 의도적으로 유발했다. 헤롯에 의한 황제 초상(肖像) 숭배 및 유대교 혼인법 무시 등은 유대교 규범을 중시하는 유대 민중의 분노를 야기시켰다. 빌라도는 주화(鑄貨)를 이방종교적 의식(儀式) 상징(Kultsymbole)으로 새겼으며, 황제의 초상을 예루살렘에 도입하고자 하였다. 그는 성전 보물창고로부터 보화(寶貨)를 끄집어내었다. 빌라도는 유물을 묘지에 세우고 여러 가지 방식으로 민중들의 유대전통에 대한 충성심을 훼손시켰다.
이러한 빌라도의 정책은 유대 팔레스타인을 그리스-이방 문화에 조심스레 통합하기 위함이었다. 총독 빌라도는 “사실적으로 불안을 야기시켰다. 빌라도의 상징적으로 수행된 유대 문화 말살 시도는 유대인들에게는 상징 정치적인 갈등으로 오도(誤導)되었다.” 여기서 로마와 유대 사이에는 단순한 친구-적(敵) 모습 대신에 차별성 있는 강한 적응 과정과 친구-적 모습으로 분리 과정이 야기된다. 지배 권력의 시책(施策)에 대한 유대 상류층의 열광적인 적응과 이에 대한 하류층 열심당의 테러주의에 이르기까지 쓰디쓴 저항은 상징 정치적 갈등으로 해석되어진다. 위로부터 오는(von oben) 적응하고 타협하는 상징 정치에 이제 아래로부터(von unten) 오는 저항하는 예언적인 상징 정치가 대응한다.
이러한 상징정치적 과정은 예수 시대에 조용한 표면 아래 있었던 일을 보여준다. 상류층의 문화동화 정치에 대하여 백성 안에 반대하는 운동이 대응하였다. 예수 시대에 유대 상류층은 세계의 권력 로마에 적응하고 제공되는 경력 기회를 붙잡고, 유대의 전통을 보존하고 방어하려고 하였다. 타이센은 해석한다: “체제 전복에 대한 헤롯 안티파스의 불안은 정당하다. 세례자의 처형 후에 곧 새로운 선지자 나사렛 예수가 출현하였다.” 예수는 현재 속에 작용하는 다가오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하였다. 예수는 한편으로는 전통을 수용하고 강하게 하며, 다른 편으로는 그것을 상대화하는 새로운 토라 해석을 제공하였다.
나사렛 예수는 무엇보다 상징행위를 귀신추방에서 제시한다. “귀신추방이란 상징적 저항으로 이해되어진다: 땅은 불결한 영들에 의하여 위협당한다. 이 영들은 인간들을 장악하여 자기 자신으로부터 소외되게 한다. 낯선 문화적 군사적 힘들에 직면한 위험에 대한 불안들이 여기에 드러난다… 귀신추방의 전승자들이 악마들 중의 하나를 군대라고 말하며, 그를 직접적으로 로마의 군사들 그리고 (불결한 돼지)와 연결시킨다면 이것은 악마신앙, 귀신추방과 땅의 일반적인 상황이 연관된다는 사실을 확증한다.”
예수는 권력자들에 대한 비판을 세례자 요한과 다르게 피력하였다. 세례자 요한은 군주에 대한 직접적 비판을 성전(聖殿)에 대한 간접적 비판과 결합하였으나, 예수는 헤롯을 ‘여우’라고 부르면서(눅 13:22) 단지 간접적으로 비판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무엇보다 성전 정화(淨化)의 상징행동을 통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직접적으로 공격한다. 귀신추방, 성전정화, 성전예언 외에 예수는 상징정치적인 행동을 하였다. 예컨대, 열두 제자 부르심에서 명료히 하나님의 통치가 이스라엘 12지파에 약속되었음을 말한다(마 19:28-30). 예수는 “백성 가운데 소박한 사람들을 이 12지파의 군주와 재판관으로” 지명한다. 예수의 예루살렘 입성도 총독의 취임에 대한 대립상(像)으로서 상징정치적 행동에 속한다. 타이센은 결론 내린다. “예수는 단지 말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써 비유를 말할 수 있었다. 그는 상징적 행동의 언어를 통달했다. 이 행동들 중의 여러 가지가 상징정치적인 성격을 갖는다.”
예수는 백성들과 땅 소유와 세금 질문에 있어서 드러나는 사람들의 갈등을 주제화하였다. 예수는 세금과 성전 공과금으로 고통을 겪던 소농(小農)들을 직접적인 저항으로 선동하지 않고 새로운 메타정치적인 최고의 실제 공동체로 상징정치적으로 통합하였다. ‘가난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들의 것임이요, 온유한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들이 땅을 유업으로 받은 것이라’는 산상설교가 선포되었을 때 세리들과 지주(地主)들에 대한 비폭력적인 저항의 상징정치가 보여질 수 있다. 예수는 자기 시대의 상징정치적인 갈등에 개입하여, 약하고 고난당하고 소외된 사람들 편에 서고, 저들을 격려했다. 그리고 예수는 하나님 통치의 선포를 통하여 귀족정치의 경력 선택권을 문제시하고 능가했다. 그리하여 예수는 귀족들과 백성 사이의 차이를 상대화하였다. “그는 상류층의 많은 가치들과 증언들을 모든 사람들에게 접근되도록 공식화하였다. 작은 사람들에게 세상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라는 엘리트 의식을 심어주었다.”

IV. 국가와 정치

1.  예수의 공식(公式):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 것은 하나님에게”

복음서 저자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바리새인들은 자기 제자들을 헤롯 당원들과 함께 예수께 보내어 예수를 올무에 빠뜨리려고 시험한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옳지 아니하니이까”(마 22:17). 이것은 대답하기 매우 어려운 질문이었다. 세금을 바치지 말라 하면 로마 정부에 반대하는 자가 되어 헤롯 당원들에게 “반역자”라고 고발할 거리를 제공하며, 바치라고 하면 로마 정부에게 세금 납부를 반대하는 유대인들, 특히 열심당원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의 빌미를 제공한다.
예수는 지혜롭게 대처하신다. 예수는 화폐를 가져오라고 하시고 거기에 있는 형상과 글을 보시면서 이것이 뉘 것이냐고 물으신다. 제자들이 가져온 화폐에는 가이사의 형상이 있으며 로마의 글이 쓰여 있었다. 예수는 이것을 보이시면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라고 대답하신다. 이것은 예수께서 가이사의 통치를 인정하신 것을 시사한다. 가이사의 통치도 하나님의 주권적 위임(委任)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세금(稅金)을 낼 것은 내어야 한다. 그러나 가이사가 넘겨볼 수 없는 “하나님의 것”이 있다. 그리고 성전세와 십일조를 비롯하여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 종교적 부담금은 종교당국에 납부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된다. 여기서 저 유명한 예수의 공식이 나온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 22:21).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 / 숭실대 명예교수)

루터와 바흐의 관계 (1)
선교사 언더우드의 『그리스도신문』 의 성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