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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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5-08-12 14:0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하시는 나사렛 예수(Ⅴ)


Ⅲ. 성만찬 제정: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2. 성례전은 물질이 하나님의 은혜를 매개하는 행동

<지난 호에 이어서>

이 마가의 다락방에서 예수는 제자들과 만찬을 하신다(마 26:17). 제자들과 식사를 하시는 가운데 예수는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신다. 마가와 마태는 떡과 관련한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 바울은 떡과 관련하여 주님의 말씀 전승을 전한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전 11:19b). 마태는 잔과 관련하여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제자들에게 주시며 제정하시는 예수의 말씀을 전한다: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마가는 잔과 관련하여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전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4). 마가와 마태가 떡과 피와 관련하여 전하는 예수의 제정의 말씀은 시내산의 언약: “모세가 그 피를 가지고 백성에게 뿌리며 이르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출 24:8)를 연상시킨다.
이에 반하여 바울과 누가는 잔과 관련하여 “새 언약”을 강조하고 있다. 바울은 예수의 전승을 전한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고전 11:20b). 누가는 동일한 제정의 말씀을 전하고 있다. 바울과 누가는 새 계약을 말하는데 이는 예레미야의 새 언약을 상기하게 한다: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31-33).
옛 언약과 새 언약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보완적인 관계를 이룬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의 성취요, 옛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새 언약을 지시하고 있다. 구약은 신약에 모순되거나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신약 안에서 성취된다. 구약의 약속이 신약 안에서 성취된다.

3. 단지 종교적 제사 아닌 성례전으로서 독특한 구속 언약 의식

최후의 만찬은 예수께서 잡히시는 밤에 제자들과 공식적으로 나누는 이별의 만찬이다. 이 만찬은 단지 스승과 제자의 정(情)을 나누는 자리를 넘어서서 예수의 죽음이 갖는 대속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자리이기도 하다.
독일 튀빙엔 경건주의 신약학자 슐라터(Adolf Schlatter)는 최후의 만찬이 단지 고별하는 애찬이 아니라 구속사적 언약이라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성만찬 제정에서 예수가 사용하신 떡과 포도주는 종교사적 의식과는 다른 독특한 것이었다. 예수가 제시하는 떡과 포도주는 이교도들이 사용한 제사행위와는 다르다. 이러한 예수의 기념 행위는 종교사에서 두 친구 사이의 혈맹의 상징으로서 서로의 피를 마시는 행위나, 영지주의자들의 마술적인 성격이 있는 희생 제사 이론이나 동양종교에서처럼 신과의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 신에게 바쳤던 제물을 제주(祭主)가 먹는 것으로 파악이 되지 못한다. 이교(異敎)에서는 제사 행위에 있어서 어떤 대용물들도 용납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교에서는 혈맹이 피를 마심으로 성립되고, 희생 동물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신과의 신비한 교통이 성립되었으나 희생 동물의 살을 대신하여 떡을 먹음으로 성립되지 않았다. 예수의 성례전적 행동에는 떡과 포도주라는 대용물들이 예수의 몸과 피를 대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물질주의와 정신주의 어느 하나의 범주에 들어갈 수 없다.
예수가 제자와 함께 기념한 최후의 만찬은 다가오는 자신의 죽음의 의미를 제자들에게 해석해주는 종말론적 만찬이며 메시아적 만찬이다. 예수는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을 수 없다고 하신 그의 말씀을 확증시켜 주셨다: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눅 13:33). 이러한 최후의 만찬에서 떡을 자신의 몸, 잔을 자신의 피로 세운 언약이라고 가르친 예수의 성만찬 행위는 그가 단지 예언자적 인물을 넘어서서 종말론적 선지자(the eschatological prophet)요, 하나님의 은혜의 새 시대를 개통하는 메시아라는 사실을 암시하는 것이다.

Ⅳ. 십자가 달리심에 대한 신학적 해석

1. 복음서 저자 요한의 해석

복음서 저자 요한은 예수께서 마리아의 동생 나사로를 무덤에서 살리신 후에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공모하여 예수를 죽이려고 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살해 음모에 관하여 요한은 그해 대제사장 가야바의 말을 인용하면서 예수 죽음에 대하여 신학적 해석을 하고 있다. 가야바는 말한다: “너희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도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요 11:49-50).
유대종교 지도자들은 예수가 일으킨 하나님 나라 운동을 자신들의 종교적 체제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하였다. 이들은 예수 운동을 한편으로 유대교 율법과 유전(遺傳)을 해체하고, 다른 편으로 로마의 지배에 대항하는 정치적인 성격을 지니는 신흥종교운동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유전을 지키고, 나아가 점령자 로마 당국으로부터 오는 정치적 책임 추궁을 불식(拂拭)시키기 위하여 예수를 죽이고자 하였다.
이에 반해서 가야바는 대제사장으로서 허세와 냉소와 이기적 의식 속에서 자신도 모르는 예수의 죽음이 함축하는 대리(代理)적 의미에 관하여 예언하고 있다.(요한복음 11장 45절-53절 해설, 『해설•관주 성경전서』, 독일성서공회판, 247.) 가야바는 나사렛 출신의 예수를 냉소하고 멸시하면서 그가 희생되면 민중들의 반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가 평온하여 산헤드린 공회에 속한 유대의 특권계급 지위가 안전하게 보존될 것이라고 이기적이고 정치적인 의미를 생각한 것이다.
이 가야바의 말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예수 죽음의 구속사적 사실, 예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하여 죽으실 것이라는 구속사적 해석을 덧붙이고 있다: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이러라”(요 11:51-2).
여기에 인간이 유대인 종교 차원에서 생각하는 사고와 행하는 행동을 그의 주권으로 관장(管掌)하시는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섭리의 간섭이 있다.
<다음 호에 계속>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김영한 (기독교학술원장 / 숭실대 명예교수)

제자들과 최후의 만찬 하시는 나사렛 예수 (Ⅳ)